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프란시스 베이컨은 영국의 정치가요, 17세기 과학적 경험주의 철학의 대부였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이성주의 철학으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 태동에 힘을 보탠 데카르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베이컨은 그의 “과학적 판단”에 방해되는 “네가지 우상”을 열거했다. 첫째는, 종족의 우상(Idols of the Tribe)이다. 이것은 인류 본성에 내재한 생래적인 한계에서 오는 것으로 사물에 대한 편견, 왜곡, 과장, 오류를 옳다고 믿는 우상이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Idols of the Cave)이다. 이것은 인간 개인의 가정, 성장 환경, 교육 배경, 습관, 관심, 이기심에서 오는 주관적 잘못을 옳은 것으로 믿는 우상이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Idols of the Marketplace)이다. 이것은 사회 집단의 여론과 집단적 의견에 군중 심리로 편승하고 믿는 우상이다. 넷째는, 극장의 우상(Idols of the Theater)이다. 이것은 정치 권력자, 지식인, 인기 배우 등의 그릇된 판단과 선동의 오류를 맹목적으로 믿는 우상이다.
베이컨이 주장한 네 가지 우상은 일찌기 주전 5세기 희랍 철학자 플라톤의 “동굴의 그림자 비유”(Allegory of the Cave)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나름대로 확대시킨 것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이데아”(Idea) 사상을 설명했다. 즉,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있는 죄수들이 동굴의 좁은 입구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에 의해 생겨진 자기들의 그림자를 보고 그것을 자기들의 실체로 믿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동굴 안은 현실의 세계요, 동굴 밖은 초월적 이데아의 세계다. 그러므로 인간이 동굴과 같은 현실에서 보고 있는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데, 인간은 그림자를 실체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그림자를 실체로 믿고 고집하는 동굴의 죄수들인 너희들은 너희 관념에 대해 회의하라. 이것이 곧 철학의 시작이다”라고 역설하였다.
플라톤이나 베이컨이나 모두, 현실 세계에 사는 인간이 스스로 올바른 관념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성경적으로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철학을 통해서, 베이컨은 과학적 경험주의를 통해서, 데카르트는 이성을 통해서 올바르고 정확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 문제였다.
사실상 플라톤이나 그 후의 아리스토텔레스, 프란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등 이성주의적 철학가들은 초월적 이데아나 보편적 관념의 추구를 시도하면서도, 초월적 하나님의 특별계시(성경)를 제쳐 놓고 오직 유한적 인간 이성만을 수단으로 삼으려 했기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오류를 극복하고자,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요 카톨릭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체계를 수립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주의 철학을 기독교 신학에 도입하여 절충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하면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합력해야 한다는 소위 “신인 합력설”(Synergism)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이 가르치는 “인간의 전적 부패”(엡 2:1)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엡 2:8)는 “신 단독설”(Monergism) 교리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일찌기 파스칼은 “신앙은 타락한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 이성으로서는 자기 구원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협력할 능력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듭난 신앙을 가져야 구원을 얻게 되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God-given Reason)을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원죄를 가진 인류는 모두 “동굴의 우상”을 믿고 살아 왔다. 원시인들은 자연을 숭배하거나(Totemism), 만물에 신과 영혼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Animism). 현대에도 무당을 믿고(Shamanism), 점성술과 손금(Palm Reading)에 나타난 자기 운명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Atheism),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보다도 “좁쌀만한 자기 이성”을 믿고 있다(Rationalism). 이러한 모든 것들이 “동굴의 우상”들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가진 관념들과 같다.
죄인이 중생 받고 신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동굴의 우상”을 벗어나, 성경에 계시된 구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개구리가 우물에서 과감히 뛰어 올라, 연못, 호수, 강, 넓은 바다를 점차로 발견해 가며 찬양 감사하는 과정이 곧 신앙의 성장이요 성숙 과정인 것이다.
혹시 아직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예수님이 구주 되심을 의심하고 있는가? Doubt your doubt! 당신의 의심 자체를 의심해 보기 바란다. 왜냐하면, 당신의 의심이 곧 “동굴의 우상”이기 때문이다. 긴 겨울이 지나고 부활의 계절, 새 봄이 찾아 왔다. 새 봄을 맞아 각자의 마음 속에 생동하는 신앙이 넘치도록 하자. 우리 모두 “동굴의 우상” “동굴의 무덤”에서 일어나서 주님 부활의 찬가를 힘차게 부르도록 하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편 14:1).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