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23, 2024

[정준모 박사 칼럼] 장로교 신학과 현실 참여

인기 칼럼

정준모 박사

– 장로교 신학과 현실 참여 –

하나님께서 교회와 국가, 양 기관을 세우셨다. 두 기관은 제각기 고유한 기능과 역할이 있다. 교회와 사회, 교회와 국가에 대한 장로교의 분명한 신학적 입장이 있다.

장로교 신학에서는 복음과 현실, 전도와 봉사, 교회와 국가의 양자 관계는 갈등과 충돌보다는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보완적, 상호협조적 관계이다.

교회가 복음사명의 본질을 떠나 사회 및 정치 운동에 몰입하는 세속화 현상을 금하고 있다.

칼빈의 사회 참여 및 정치사상

칼빈은 사회와 정부에 대하여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재세례파와 달리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정부 관리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의 완전하심 밖에 있는 육적인 자들”로 보는 재세례파와 달리 “신적 권위를 부여받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통치자,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자”로 보았다.

칼빈은 정부 혹은 관리에게 항거하는 것은 죄악 된 인간 본성의 한 증거로 보았다. 그는 당시 정부를 전복하려는 과격한 재세례파와 달리 정부의 권위에 순종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정부가 권세를 악하게 남용할 때는 철저히 대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반면 그는 최고 국가권력에 대한 무력적 찬탈을 반대하였으며, 또한 한 권력자의 권력 세습을 반대하였다.

칼빈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구별되는 책임, 즉 교회와 국가는 개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고 보았다.

영적 문제를 다루는 교회와 세속적 문제들을 다루는 국가 간에는 서로 다른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칼빈은 이 두 기관은 견제와 균형을 이루면서 권력이 집중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칼빈의 정치사상과 유럽 및 영미에 끼친 영향

프랑스 칼빈주의와 위그노들의 정치사상은 칼빈의 영향을 받았으나 오히려 칼빈보다 더 진보적이고 저항적 성향을 띄게 되었다.

또한 칼빈의 정치사상은 신학 사상과 더불어 존 낙스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미쳤다.

칼빈은 국가 존재의 목적을 질서유지에 있다고 보았으나 존 낙스는 국가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

칼빈의 사회정치 사상은 영국의 청교도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크롬웰의 혁명은 칼빈과 낙스의 언약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실현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노력이 영국의 입헌군주제 마련에 디딤돌이 되었다.

또한 청교도의 사회정치 사상은 미국의 사회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청교도들은 극단적 선민사상으로 우월의식이 매우 강했으나, 인디언을 비롯한 다른 종족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 입장을 취하였다.

청교도의 영향을 받은 미국 헌법은 정교분리 원칙을 따랐다. 이러한 미국의 정교분리 원칙이 초기 한국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의 사회정치관에 큰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초기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사회, 정치관

1901년 9월 20일 세워진 장로교 공의회는 ‘5가지 정교분리 원칙’을 채택하였다.

장로교 공의회는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가지 조건”이라는 제목하에 지교회와 교우들에게 편지하는 형식으로 전달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사들은 나라, 정부, 관원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둘째, 교회 일과 나라 일은 같은 일이 아니며 교회가 나라 일을 보는 회도 아니며 나라 일을 간섭하지 않는다.

셋째, 대한 백성이 예수교회에 와서 교인이 될지라도 황제를 충성으로 섬기며 관원에게 복종, 나라 법에 순종하기로 가르친다.

넷째, 교인을 나라 일 편당에 참예하지 않게 하며 나라 일에 실수하거나 범죄하면 나라에서 가려 준다.

다섯째, 교회에서는 나라 일을 의논하거나 나라 일을 공론하지 않을 것이다 등이다.

이것은 미국의 정교분리 원칙이 선교지인 한국교회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본다. 당시 선교사들이 일제침략 시기에 선교의 효율성을 위해 교회의 비정치화와 선교사들의 피선교국 정치 불간섭주의 입장에서 정교분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 속에서도 언더우드, 아펜셀러, 해밀턴 선교사들은 일제의 조선 침략과 비인도적 만행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선지자적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한국장로교의 사회, 정치 운동의 역사적 현장

초기 한국 장로교회

1884년 복음이 전파된 이후, 한국 장로교회는 교육, 의료, 미신타파, 조혼폐습 타파 및 남녀평등사상 고취 등 개화운동 앞장섰다.

초기에는 교육 및 의료사업 등 소극적 사역에서 점차 농촌계몽, 민족운동 등 적극적 사회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05년경까지는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 을사조약 등의 영향으로 한국 장로교회가 조직적으로 국권회복이나 정치참여를 할 수 없었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강제 교환, 한국 자주권 상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으로 일제 통치 본격화, 1907년 7월 고종 퇴위, 1907년 정미 7조약에 의한 구한국 군대 해산, 1907년 8월 22일 한일합병의 국운 상실로 한국 민중과 기독교인들에 좌절감과 패배감에 휩싸이게 했다.

그러나 1905년 이후 1910년 사이에 일제의 악랄한 수탈 현장을 보면서 대부흥운동과 항일의식이 구국기도회, 민족 운동을 위한 기도회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더욱이 1905년 9월 장로교 공의회는 전국 교회가 추수감사절 다음날부터 한 주간 구국기도회를 시행하도록 결의 실시함으로 민족 사랑과 국권회복 운동을 신앙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한국 장로교회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한쪽으로는 민족의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하는 신앙의 내면화 혹은 탈정치화, 다른 한쪽은 더 급진적이고 과격한 민족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10년에는 농촌 개량과 농민의 권익 보호를 위해 윤치호가 실업학교를 세우고 YMCA는 공업학교를 세워 젊은이에게 산업육성의 안목을 일깨워주었다.

독립협회의 기독교 인사들인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신홍우, 이원긍, 이승만, 주시경 등 초파적 기독교 애국지사들이 항일운동에 동참하거나 선교사들을 도왔다.

1911년 105인 사건이 일본의 조작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선교사들은 일본의 한국 통치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항거하는 개화 및 독립운동 정신을 불어넣었다.

1919년 2·8 독립 선언을 일본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 중심으로 한달 내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3·1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919년 고종황제 장례식은 한국 민족의 가슴을 찢어놓았고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선두와 배후에는 장로교 선교사, 지도자 및 교회가 그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다.

삼일운동과 한국 장로교회

1919년의 3·1운동은 33명의 민족 대표자들의 철저한 비저항적 평화적 시위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 중 기독교인이 16명이었고, 그중 장로교 교인이 10명이 될 정도로 장로교인이 절대 우세하였다. 그 결과 일제의 교회 탄압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 실례가 같은 해 4월 15일에 있었던 제암리교회 방화사건과 성도 몰살사건이다. 그 결과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다.

한편으로 소극적, 회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더욱 민족의식이 심화되어갔다. 특히 민족 운동에 앞장선 한국 장로교회 모습이 1920년 이후 한국교회 성장과 부흥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신사참배와 한국 장로교회

1932년 만주사변 전몰장병 위령제가 국민의례로 둔감하여 신사참배를 강요받게 되었다.

1932년 9월 제21회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 거부를 결의하였다. 그 후 1937~1938년 사이 장로교 계통의 학교에 유난히 집중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많은 학교들이 폐쇄조치를 당하게 되었다.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회의 모습은 일천황을 그리스도의 머리로 대신하는 배교 중 배교 행위였다.

1938년 제27회 장로교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 한국교회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런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그런 비극 상황에서도 장로교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목회자, 장로, 선교사, 성도들이 옥중 투쟁,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한국교회를 지켰다.

주기철, 박관준, 한상동, 한부선 등은 하나님 영광을 위한 순교 신앙, 신사참배 반대 및 회개운동, 그리스도 머리되심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성경관과 교회관을 가지고 한국 장로교회를 지켰다.

일제 해방 이후 한국 남북교회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남북한 교회는 새로운 상황에서 정교문제를 맞게 되었다.

1945년 9월 2일 ‘조선 분담 점령책’ 이후 북한은 소련, 남한은 미군이 통치하기 시작했다.

북한 공산당에 의해 북한교회는 박해, 수탈 및 수난을 당했다.

반면, 남한교회는 미군정의 개신교회에 대한 호의와 배려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원조물자가 교회를 통해 전달됨으로 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크게 상승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당선, 자유당 정권 시에는 한국교회가 반공이념으로 정부와 밀착된 관계를 가졌다.

제1공화국 시대에는 정교분리의 헌법상 원칙을 무시할 만큼 정교밀착 관계를 가졌다.

4·19 및 제3공화국 시대를 지나면서 교회의 정부에 대한 비판, 교회지도자들의 정치 이데올로기 대립에 휘말리는 동안 6·25 한국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1960년 군사정권 시대 이후 한국 장로교회

1960년 군사정권 시대에 이르러 반공과 함께 산업화가 추진되게 되었다.

이때 한국 장로교회는 표면적으로 정교분리를 외치면서 정부관계에 대하여 보수 및 진보의 두 입장으로 급격히 나누어지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 문제에 대하여 보수진영 교회에서는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진보진영 교회는 민주화 운동 등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정교분리 원칙, 혹은 정권에 야합하는 보수진영 교회의 모습과 급격한 사회, 정치 운동으로 확산된 해방신학 및 자유신학에 영향을 받은 진보진영 교회의 두 얼굴을 보게 되었다.

1970~1980년대 한국 장로교회

1970년대의 한국교회는 국가 비상사태, 유신헌법, 남산부활절 예배사건, 민청학련 사건, 명동사건 등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때, 보수 장로교회는 정권의 부조리에 대한 선지자적 사명을 외면한 채, 영혼구령과 교회성장 몰두했다.

반면, 진보 장로교회는 정부와 사회의 부정부패, 노동운동, 인권탄압저항, 정치민주화 운동으로 교회의 본연의 자세를 잃고, 교회의 정치 세속화에 빠지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12·12 사태, 광주민주화 운동,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6월 민주항쟁, 노동운동, 농민운동, 통일운동 등에 대하여 보수 및 진보간에 첨예하게 다른 입장을 취하였다.

한국 장로교회의 사회, 정치관에 대한 평가

칼빈의 후예인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는 “그리스도인은 시민으로서 그 삶의 질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시민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한 일”로 보았다.

한국 장로교회는 지난 100년 동안 복음 전파 사역과 대 사회 및 국가에 대하여 역사적 상황에 따라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대응해 왔다. 군사독재 정권 이후, 한국 장로교회는 지나치게 개인구원과 교회 성장에 치중하고 대사회 관계와 국가 관계에서 매우 소극적 입장을 취했음을 반성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사회, 국가에 강물같이 흘러내리게 할 선지자적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였다.

현재 국가와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부정부패, 사회병리 현상, 빈익빈 부익부, 청소년 사회 및 학원 문제, 다문화 가정, 사립학교 문제, 사회윤리, 배아복제, 녹색운동, 수쿠크법 등에 대사회 및 국가 문제에 대하여 민감하게 대처하여야 한다.

교회의 사회 및 국가에 대한 무관심은 결국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복음과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몇 해 동안, 교회의 각종 비리 문제로 대사회에 미친 부정적 인식을 해소하기 위해 교회는 ‘파사현정’(破邪顯正) 자세로 뼈를 깎는 자성이 필요하다. 특히 교회의 법적 판단을 국가법에 맡기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삼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워필드(B. B. Warfield)의 “칼빈주의는 칼빈 신학에서 흘러, 한편으로는 교회 조직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정치적 환경과 관련된 사회적 질서에서 흘러내려 가야 한다“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정치적 불완정성을 인식한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가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정치적 참여에 앞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보다 더 완전한 것이 없다”고 한 말을 한국 장로교회는 꼭 기억해야 한다. 사회와 국가의 질타를 받고 있는 부끄러운 교회 모습을 씻고 개혁 신앙과 신학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예언자적 사명을 잘 감당해야겠다.

특히, 차별금지법, 동성애, 낙태, 마약, 국정교과서의 기독교에 대한 편협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합법적으로 성경적 원리, 신념 그리고 가치관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교회적으로 깨어 파수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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