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모 목사의 시편 강해(4) 시편 2편(2) –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B. 이방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7-12).
1. 아들의 법령(7-9절).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표준 새 번역은 “7. 나 이제 주께서 내리신 칙령을 선포한다.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c) 네 아버지가 되었다. (c. 또는 너를 낳았다) 8. 내게 청하여라. 뭇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네 것이 되게 하겠다. 9. 네가 그들을 d) 철퇴로 부술 때에, 질그릇 부수듯이 부술 것이다 하셨다. (d. 또는 철 홀로 다스릴 때에)”라고 되어 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법령(의정서, 칙령, 영令) 전한다. 이것은 어떤 인물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준하는 증빙 문서를 의미한다(Kraus). 이 법령의 다윗 언약인 삼하 7:14의 내용과 일치한다. 다윗 언약에서 다윗과 그의 후손은 여호와의 양자로 선택되었다. 양자됨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여받게 되었음을 뜻한다. 즉, 다윗 계열의 왕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땅을 기업으로 받고 아울러 그의 대적들을 심판할 권세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Weiser, Briggs, Rogerson, & Mckay).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목된 시온의 왕은 신약시대에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본 절은 구속 역사 관점과 언약 신약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행하여질 예수의 대관식을 보여 준다.
또한, 본문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정을 받는 동시에 그 증거들이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그것은 (1) 예수의 세례(마 3:17), (2) 변화 산상에서의 변모하심(마 17:5), 그리고 (3) 예수의 부활 등이다. 이 셋 중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만왕의 왕이심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충분하게 남는다(Craigie).
그는 메시아의 예표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핵심 내용인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메시아에 대해 세 가지를 예언한다. 그런 맥락에서 본 저자를 다윗으로 본다.
첫째로, 메시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7절에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며, 그가 아버지의 아들임을 밝히시고, 아버지에게서 ‘난 자’로서의 그의 신분을 강조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장 5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라고 언급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모든 천사보다 우월하신 증거로 인용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모든 천사보다 더 뛰어나고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다고 언급한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뛰어난 ‘이름’은 바로 ‘아들’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때로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른다(욥1:6).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특정한 의미에서 어떤 천사에게도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것은 오직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 이름이 바로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2위 성자, 아들 되신 하나님의 호칭이다. 놀랍지 않는가?
‘오늘날’은 언제인가? 하나님께도 우리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자가 아니신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오늘날’은 ‘영원한 현재’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관계는 영원적이다. 그것은 그의 아들의 신성(神性)에서 증거된다. 시간 세계 속에서의 관계라면 아들은 참된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창세 전에 그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다(요 17:5). 성경의 풍성한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부활로 확증되었다(요 20:30-31; 롬 1:4).
둘째로, 메시아 왕국은 온 세상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8절에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했다.
“내게 구하라” 이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20:4;21:2, 4;삼하 24:12;왕상 3:5). 하나님께 자유롭게 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선택된 왕, 그의 아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자녀인 성도들이 받은 기도의 특권이기도 하다(요16:23-24).
이어서,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선택된 왕의 아버지이신 주 하나님은 온 우주를 소유하고 계신다. 그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게 온 땅을 물려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상속자(相續者)(마 21:38;갈 4:7)가 되기 때문이다.
크라우스(Krause)는 “‘그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겠다’는 뜻은 그의 통치가 온 세상에 미칠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또한 페로네(Perowne)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신 자녀에게 ‘아낌없이’ 무엇이든 주신다” 뜻이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한 우주적인 통치를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Craigie, Rawlinson, Briggs).
사실, 이스라엘 역사상 그 어떤 왕도 8절의 제시된 것처럼 이방 나라, 곧 열방 모두를 복속시키고 땅끝까지 다스린 적이 없다. 솔로몬 경우에도 그의 통치권이 북으로 유브라데 강변까지 남으로 애굽 하수까지 미쳤다고 할지라도 두로같은 푀니시아 지역은 복속하지 못하였다(왕상 11:14-25).
물론 하나님의 약속에는 유브라데 강 이편에서 대해까지, 애굽 시내까지 이스라엘이 차지할 약속의 땅이다(창15:18-21; 신1:7; 수1:4; 왕상 4:21). 이 약속은 솔로몬 당대에 잠시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영토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2장 8절의 ‘세상 끝까지’는 문자적 성취가 아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약속의 땅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 통치가 지역적인 가나안 약속의 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미친다고 선교학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시 6:1-7; 68:31-32; 72:8; 사49:6; 단 7:14; 눅2:32; 행1:8; 행13:37)등이다.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유업을 받으시고 온 세상을 심판하실 권세를 하나님 하아버지께서 맡기셨다. 요한복음 5장 22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종말에 이르러 요한계시록 11장 15절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고 예언하셨다.
구약의 다윗 왕국의 확장은 신약의 메시아 왕국을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며(마 28:19; 행 1:8)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계 7:9). 세계 복음화에 대한 시편 저자의 예언으로 오늘날 거의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로, 메시아께서는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실 것이다.
9절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저희를 깨뜨린다’는 원어(테로엠)는 고대 번역들(LXX, Syr, Vg)에서 ‘저희를 다스린다’(티르엠)는 말로 읽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니엘 2:34에서 ‘열방을 부서뜨리는 돌’로 예언되셨다.
철장(鐵杖, rod of iron)은 ‘쇠로 만든 지팡이나 막대기, 철퇴”이다. 쇠막대기로 질그릇을 부수는 것은 고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질그릇, 항아리에 적국들과 그들의 왕들의 이름을 적어서 박살을 내면서 그들을 통치하고 지배할 것에 대한 상징적 행동을 나타낸다. 애굽의 왕들은 대관식 때에 주변 세계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과시하기 위하여 주변 나라들의 이름을 적은 질그릇들을 깨뜨리곤 하였다(Kraus).
역사적으로 볼 때, 다윗 왕국이 이처럼 강력한 통치권을 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께서 초림의 부활 역사와 재림의 온 우주 심판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애굽의 왕은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질그릇을 깨뜨렸지만 메시야는 ‘실제로’ 질그릇을 깨뜨림과 같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철장으로 다스리는 자’로 묘사되셨다(계 2:27; 12:5; 19:15). 그의 통치권은 그의 구원 사역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으나,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행 17:31; 딤후 4:1).
어떤 학자들은 ‘깨뜨린다’는 단어가 파괴적인 용어이므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그라스도의 통치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Wette, Hupfeld). 그러나 이 구절은 계시록에서 세 번이나 그리스도의 통치와 관련되어 인용되었다.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를 묘사한 구절이 여러 곳에 나와있다(계 2:27;12:5;19:15). 로린손(Rawlinson)의 언급처럼 “그리스도의 통치에는 두가지 요소 즉, 평화적인 요소와 아울러 악한자들에게 무서운 형벌을 내리시는 심판적인 요소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이방 나라들에 주신 법령(10-12).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표준 새 번역에는 “10. 그러므로 이제, 왕들아, 지혜를 배워라. 땅 위에 있는 통치자들아, 경고하는 이 말을 받아들여라. 11. 두려운 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여라. 12.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진노하실 것이니, 너희가, 걸어가는 그 길에서 망할 것이다. 그의 진노하심이 지체없이 너희에게 이를 것이다. 주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
10절에서 12절은 이방인들에게 주는 법령이다. 이 법령에는 이방인들이 행하여야 할 일들 3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 둘째, 그 아들에게 입맞추는 것, 셋째,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등이다.
10절은 세상의 악한 자들에 대한 권고이다.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 곧 메시야에 대한 도전에 대한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복종을 촉구하고 있다. 그들에게 지혜롭게 행동하고 그의 경고를 받아들여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 지혜로운 행동과 경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11-12절의 내용이다.
첫째,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떨며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하여 랑게(Lange)는 “첫째로, 신앙적인 차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라는 뜻이며, 둘째로) 정치적인 차원에서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에게 복종하면서 다윗 왕조의 속국으로 만족하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복하라는 권면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 태도이다(잠 1:7). 떠는 것은 마땅히 두려할 자를 두려워하는 뜻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촉구하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참된 기쁨과 만족을 얻으라는 말이다.
히브리서 13:28도,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교훈하였다. 경건함과 두려움과 기쁨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생활의 올바른 덕목들이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메시야에게 ‘입 맞추라’고 권한다.
입 맞추는 것은 주로 고관이 아랫사람의 겸손한 키스를 받는 복종의 키스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과의 관계에서 원하시는 애정을 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앞에서 우리의 합당한 위치와 자세를 갖추시길 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서 기뻐하고 사랑의 관계를 갖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와 중보자이시며 세상의 모든 왕들 중의 왕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를 구주와 주로 고백하고(롬 10:9; 고전 12:3)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들의 길에 속히 임할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6:22).
하나님이 세우신 왕께 입맞추지 않으면, “길에서 망한다”고 했다, 그 뜻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객사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자기에 주어진 명에 다하여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는 뜻이 있다. 이것은 각자가 처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진노의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왕권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아들 되신 메시야에게 순복하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자는 그 악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심이라”이라고 했다. 공동번역에는 “자칫하면 불붙는 그의 분노” 표준 새 번역에는 “자신이 걸어가는 그 길에서 망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신속한 심판을 일컫는 것으로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시는 진노의 무서운 경고로 끝나지 않고 복된 삶을 누리를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이며 이방 나라들의 회심을 요청하는 것이다.
셋째로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의 뜻은 문자적으로 “그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자”이다. 곧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이다.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대적하고 음모를 꾸미지 말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진정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이다. 세상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사람이나 그의 지혜도 의지하지 말고 돈이나 재물도 의지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사람이 참으로 의지할 자는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뿐이다.
결론을 맺으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신하는 자에게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그분을 바로 알고 섬기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에게 진노하시나 그에게 피하는 자에게는 확실하고 분명한 도움과 보장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구속 역사와 언약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이 세상 나라와 세상 권력이 그리스도의 나라, 그리스도를 도전하고 악한 도모를 꾸릴지라도 결국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승리할 것임을 선포하며 그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 나와 굴복하고 그분을 경외하며 섬기라는 뜻이다. 늘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