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2, 2025

[임인철 목사 칼럼] “실제 삶을 만드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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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가스중앙교회 임인철 담임목사.

올해는 6.25전쟁 발발 75주년입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동족상잔의 비극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불법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두 달여 만에 남한 국토의 대부분을 북한군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기적처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되었습니다. 이 슬픔과 고통의 전쟁을 일으킨 주범은 김일성이었습니다.

사실, 김일성의 외가는 엄청난 기독교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외증조부 강량욱, 외조부 강돈욱, 외삼촌 강진석 모두 장로교 목사였고, 특히 외할아버지는 평생 교육자이며 평양 칠골 교회 장로요 목사였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의 어머니는 칠골 교회에 다녔고, 이름은 강신희였으나, 미국 선교사 넬슨 벨이 세례를 주면서 베드로처럼 “반석”으로 살아가라고 세례명을 지어주자 강반석으로 개명했습니다. 그리고 19살 때 이웃 마을 묘지기 손자요 아들인 김형직과 결혼하여 아들 김성주(거룩한 기둥 같은 인물이 되라는 김일성의 본명)를 낳고 일제 탄압을 피해 가족이 만주로 이주했습니다. 남편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며 두 아들 철주와 영주를 낳았으나, 큰아들이 14살 둘째는 10살 막내는 5살 때 남편이 31세 젊은 나이에 소천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성주의 어머니는 만주 부농 조광준과 재혼했지만, 1945년 해방이 되자 남편은 지주로 몰려 중국 공산당에게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23살 때 평양 숭실중학교 동창인 손정도와 같은 마을 출신인 백두산 호랑이로 불린 독립투사요 역시 독실한 예수교 신자 오동진과 함께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했는데, 손정도와 오동진, 김형직의 동지애는 기독교 신앙과 독립운동으로 맺어졌습니다. 14세 소년 김성주가 부친과 사별하자, 오동진이 길림시의 명문 사립 육문 학원에 입학시켜 후원했고, 김성주가 감옥에 갇히자 손정도 목사는 딸을 시켜 옥바라지했으며,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 오동진과 손정도 목사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구구절절이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성주는 항일무장 투쟁 시절에 가명으로 김일성(金日成 ‘태양처럼 빛나는 인물’의 의미)으로 개명하여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김일성이 김성주로 살았던 때는 누가 보아도 애국 조선 청년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삼촌(김형록, 김형곤) 모두 항일 독립운동했던 집안에다가, 외가의 목사 가문, 특히 감수성이 예민하던 청소년 시절은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한 항일운동파 아버지의 동지들은 사상적인 자양분이 되어 김성주는 항일 유격대로 만주에서 활동했고, 이걸 가지고 명예욕을 채우려고 훗날 날조하여 북한 종신 통치자로 군림하다가 세기적인 독재자 시조가 되어버렸습니다.

‘실제 삶을 만드는 믿음’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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