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그리스도의 사랑
로마서는 성경이라는 반지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한다. 로마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한마디의 말씀으로 루터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역사를 새로 쓰게 했을 뿐 아니라, 교육, 과학, 사회, 모든 분야에 개혁을 가져왔고, 결국 ‘문예부흥’을 가져왔다.
로마서 8장은 로마서의 앙꼬에 해당한다. “기독교 신앙의 대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 에덴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의 나무, 산맥의 연봉들 중에서의 최고봉, 이런 표현들이 8장을 그토록 많은 사람이 성경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책으로 간주하는, 책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단락으로 격찬하는 은유들 가운데 일부다.”(이상근 박사)
본 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으로 가득 차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8장은 구원받은 성도가 지상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인 성화에 대한 말씀이 있다.
본 장에서, 성령이 21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Dr. Dunn에 의하면 본 장에는 ‘종말론적인 긴장’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구원을 받으므로 죄와는 결별하고 이제 탄탄대로만 기다리고 있지 않다. 여전히 성도는 죄인이면서 의인이다. 이런 이중 신분을 모르고 한쪽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죄인이라는 생각에 매일 회개하나 문제는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린다. 어떤 사람은 의인이라는 생각에 회개는 하지 않고, 교만에 빠져버린다. 성전에 올라간 두 사람,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사람은 자랑만 늘어놓고, 어떤 사람은 가슴만 쳐댄다. 그러나 우리는 두 사이에 ‘종말론적 전투’를 하고 있다. 언제까지? 종말이 올 때까지, 달리 말하면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을 때까지. 우리의 작은 몸은 성령의 법과 죄의 법이 서로 싸우는 전투장이다. 누가 이길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승리는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싸우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면 되나? 그건 아니다. 힘들지만 싸워야 한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 아니면 녹화된 축구경기를 볼 때 어떻게 끝날지 몰라 주인공이 힘들면 우리도 힘들다. 그러나 happy ending으로 끝나는 것을 알면 안심하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다. 우리 영적 싸움의 끝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본 장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5τίς (Who) ἡμᾶς (us) χωρίσει (will separate) ἀπὸ (from) τῆς (the) ἀγάπης (love) τοῦ (of) Χριστοῦ (Christ,) θλῖψις (tribulation) ἢ (or) στενοχωρία (distress) ἢ (or) διωγμὸς (persecution) ἢ (or) λιμὸς (famine) ἢ (or) γυμνότης (nakedness) ἢ (or) κίνδυνος (danger) ἢ (or) μάχαιρα (the sword.)
사역(私譯)을 붙이자면, 누가 감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원어적으로 단순히 묻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답변을 기대하는 질문으로 강조를 나타낸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7가지)일까 보냐?
여기에서 관심을 끄는 곳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이것은 주어적 소유격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굴곡이 많아 늘 불안하다. 번잡한 길거리에서 어린 아들이 아버지 손을 잡는 것처럼.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안정적이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은 것처럼.
다음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끊을 수 없느니라’(χωραζω, 코라조)라는 단어로 기본 뜻은 분리이다. 거리상으로는 ‘떠나다’, 상징적으로는 ‘멀어지다’ 그리고 ‘헤어지다, 이혼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떠나지도, 멀어지지도, 헤어져 갈라서는 일도 없이 우리를 붙드신다. 할렐루야!!!
/ 필자 손성호 박사는 총신대학 종교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총신신학대학원(M. Div), 리폼드신학대학원(MRE),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석사(MRE)및 철학박사(기독교 교육 전공)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