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자비롭고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자유의지’에 의한 필수사항이다. 작든 크든, 심지어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조차 인생은 항상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이러한 ‘필수적’ 선택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출생과 선택은 잠시도 멈출 수 없는 호흡처럼 끝을 향하여 동행한다.
그 만큼 선택은 우리의 삶 가운데 매우 중요한 ‘필수적’ 선택사항인 것이다. 마치 우물 안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만으로 보이지 않는 우물의 맨 밑바닥을 감지해내야 하는 것과도 같다. 겉보기에는 깨끗해 보이지만 바닥에 깔린, 이미 굳어버린 온갖 오물들로부터 오염되어 있을 수도 있는 ‘죽음에 이르는’ 우물인지 아니면 ‘생명에 이르는’ 우물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타들어가는 갈증을 해갈해줄 단 한 모금의 물을 얻기 위해 선택해야 한다. 마실 것인지, 말 것이지. 그 한 모금의 물을 얻기 위한 선택은 우리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것이다. 순간의 결정, 선택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선택은 나의 ‘자유의지’로 하지만 우리의 생명줄은 내가 취한 ‘선택’이 쥐고 있는 것과도 같다.
이처럼 중요한 올바른 선택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성적 판단으로도 충분히 가능할까?
덴마크 출신 유명 철학자 쇠렌 오뷔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삶이란 돌발적인 비약과 질적 변화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결정(선택)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것’이라고 말했다. 선택은 그만큼 절박하고 중요한 결정사항이라는 반증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신학자이기도 했던 그의 의자와는 상관없이, 장 폴 사르트나 프리드리히 니체처럼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아닌 기독교적 실존주의로 평가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실존주의를 팽창시키는 통로가 돼 버렸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인간 각자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선 객체다. 자신의 절망에 맞서 담대히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무한성’을 의식하는 결단(선택)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이다.”
올바른 선택, 전능하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지상 최고의 전략임을 여실히 알려주는 내용이다.
선택은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 ‘…먹음직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7)라는 겉모습만 보고 선택하면 안 된다. 이처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자유의지’에 의한 ‘불순종’의 잘못된 선택은 인류의 원죄(Original sin)를 낳고 말았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는 양보의 미덕을 통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5)는 보이지 않는 미래의 축복을 거저 얻었다. 반면 롯은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처럼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한 잘못된 선택으로 ‘죽음에 이르는’ 결정을 하고 말았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이 예비된 선택을 해야 한다. ‘죽음에 이르는’ 잘못된 선택이 아닌 ‘생명에 이르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올바른 선택은 저절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건이 따른다.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좇아 살고 순종하며 기도하는 사람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적’ 선택이다.
혼미한 세상 속에서 갈 바를 익히 알지 못하는가? 교회를 찾아라. 말씀을 가까이 하라. 기도하라. 올바른 ‘특권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길이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