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경기, 서울, 경복, 여자 경기, 이화
숙명, 이화, 숙명에서, 학생들을 선발 조직
한국대학생선교회(CCC)는 1958년 고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에 의해 창설되었다.
고려대학교 재학시절 김준곤 목사에 의해 학생간사로 발탁이 되어 김 목사를 보필한 강용원 간사(미주KCCC 대표 역임)는 김 목사의 설교문 초안을 한글 문법에 맞추어 정리하는 일을 하는 한편 1964년 1월 27일 <CCC편지>를 정기 간행물로 창간하는 일도 편집장을 맡았다. 1971년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그 일을 계속했다.
강용원 간사는 “그때 표준으로 가리방에 초를 묻힌 초종이를 위에 대고 철필로 글자를 긁어서 프린트를 하던 인쇄 형편으로는 최고 수준의 고급인쇄로 <CCC편지> 를 발행했다.”고 회고했다.
강 간사는 “CCC 간사였던 하용조 목사가 온누리교회를 시작하고 1985년 월간 <빛과 소금>이라는 초호화 잡지를 발행하기 전까지는 한국 최초의 기독교문학의 시도 같은 작은 시작이었다.”고 했다.
강 간사에게 <CCC 편지> 초대 편집장과 미주KCCC 창설 초대 대표라는 타이틀 못지않게 소중한 타이틀이 있다. 그것은 바로 1964년 창설한 HCCC 1기 모임이다.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HCCC 1기들은 60주년 전 까까머리 고등학생으로 신앙의 열정과 비전으로 만들었던 문예지를 복원하는 한편 지난 60년의 삶을 정리한 기념문집을 만들 것이라고 한다.
강 간사는 “HCCC는 보이스카웃 조직 화랑도를 의식해서 만들었던 조직이었다. 초기에 이룩된 HCCC 조직에 김준곤 목사님도 좋아하셨고, 몇 차례의 수련회도 적극 참여해 지도하셨다.”고 했다.
이어 “당시 소위 서울의 일류 고교 6곳, 남자 경기․ 서울․ 경복, 여자 경기․ 이화․ 숙명에서 학생들을 선발해서 조직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내가 충분한 지도는 못했을지라도 HCCC 1기는 너무 훌륭한 성장을 이루었다. 한국의 정치, 경제, 과학, 외교, 복지, 제약분야에서 나라의 큰일을 담당하였고, 자랑스러운 그룹인물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강 간사는 “예를 들어도 좋겠지만 당사자들의 사회적 정치적으로 누가 될까 싶어 숨겨두겠다.”고 했다.
HCCC 1기에는 이미 알려진대로 김상철 전 서울시장,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저명한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강 간사는 “나는 이제 달려 갈 길을 거의 다 온 것 같다.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HCCC 1기를 창설했다는 사건”이라며 “HCCC 1기 들은 나의 꿈이요 비전이요 내 인생의 보람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들 가슴에 내가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강용원 간사가 HCCC 1기 60주년 기념문집에 실을 원고 전문.
1964년 서울의 봄은 봄답지 않았다. 해 넘어가는 석양 줄 끊어진 기타를 들고 끝없는 G선의 엘레지를 타는 우리들 모습이었다. 4.19 태풍이 휩쓸고 간 대학 컴퍼스는 쥐구멍 뚫린 듯 흉흉했다. 이때를 놓칠 세라 북한의 대남공작은 특히 학원가를 중심으로 치열했다. 이데올로기 흑백논리 시대였다.
대학 캠퍼스는 온통 헛간에 구멍 뚫린 듯 남파 간첩이 포섭할 인재를 찾아 자신도 모르게 용공집단에 명단이 올라있고 귀퉁이마다 술렁이는 혼란과 그리고 방황의 시간이었다.
무신론 실존주의 까뮈나 샤르트르가 지성을 과시하던 시절, 어디를 가도 “이방인”의 망령이 그림자처럼 우리 의식을 따라 붙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어디에다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었다. 어두울수록 좋은 침침한 다방 아랫구석 담배연기 자욱한 음악 감상실이 유일한 쉼터였다. 어두울수록 편안함을 택한 어두운 박쥐시대를 살고 있었다. 4.19를 전후한 우리 세대의 피잔 한 젊음들의 모습이었다.
그때 미국유학에서 돌아오신 김준곤 목사님은 중구 저동에서 학생 신앙운동을 시작하셨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다 목사님을 만났고 내가 했던 일은 <지성의 귀로>라는 팜플렛 같은 프라이어를 만들어 드리는 평범한 알바생이었다. 학생간사로 목사님을 도와 보필하는 모든 일은 문설 같은 설교초안을 만들어 주시면 한글 문법에 맞추어 정리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러다가 그해 1964년 1월에 <CCC편지>를 정기 간행물로 발행하게 되었다. 그때 표준으로 가리방에 초를 묻힌 초종이를 위에 대고 철필로 글자를 긁어서 프린트를 하던 때였다.
나는 그 시절부터 요새 말로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저동 회관에서 1주에 한번 정기 집회가 열리고 학생회가 만들어졌고 지금말로 집회 순서지 주보를 <Crusade> 라는 타이틀, 그때 ‘정신병 초기증세’ 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글을 써서 올렸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독선이요 건방진 자랑 삼아 올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를 할 곳도 대상도 없기 때문에 여기에 한마디 올려 보는 것이다. 양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당시 최상의 질로 해보라는 문장가이면서 유명 설교가인 김준곤 목사님의 뜻에 따라 동아츨판사가 처음으로 독일에서 들여온 하이델베르그라는 최신 인쇄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목사님은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조선대 문학과에 편입하셔서 시인 김현승 교수 밑에서 문학을 공부하시고 전북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은 타고난 글 솜씨를 갖춘 분이다.
그 당시 인쇄 형편으로는 최고 수준의 고급인쇄로 <CCC편지> 를 발행했다. 내가 알기로는 CCC 간사였던 하용조 목사가 온누리교회를 시작하고 1985년 월간 <빛과 소금>이라는 초호화 잡지를 발행하기 전까지는 한국 최초의 기독교문학의 시도 같은 작은 시작이었다.
나는 그때 두 가지 일을 했다. 한 달에 2회씩 격주로 <CCC편지> 를 발행하는 일과 <HCCC 1기>를 모집해서 지도하는 일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보이스카웃(Boy Scout)을 했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애들을 보이스카웃 조직으로 묶어 놓으면 서로 도와주고 친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 단복도 멋이 있어 좋았지만 삼지를 펴고 외우는 ‘3선서 12규율’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는 표어가 좋았다. 반조직이 7명 있고 반조직 위에 도반이 있었다. 도반이 모이면 대를 이룬다.
나는 반장, 도반장을 거쳐 대장을 맡아 김종필 총재가 대회장이 되어 1966년 태릉잼버리대회 때 끝을 냈다.
내가 조직했던 HCCC는 내 머리 속에 있던 보이스카웃 조직이었다. 그래서 반별 모임과 대별 모임인 전체 모임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때 내 생각은 앞으로 멀리 보고 이 단체가 살려면 이를 연결 지을 엘리트 그룹이 뒷받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국시대 통일신라를 이끌었던 화랑도 같은 엘리트그룹으로 생각하고, 그런 확신이 있었다.
<순론(筍論)>으로 정리하신 목사님은 옛날 사랑방 같고 주막 같은 방의 세포조직 의 원본으로 CCC운동의 핵심 단위로 정리하셨다.
나중에 이 운동은 순운동이라는, 미국 본부에서 CCC운동의 핵심이 된 <SOON Movement Global>이라는 새로운 운동 국제조직으로 발전시켰다.
HCCC는 보이스카웃 조직 화랑도를 의식해서 만들었던 조직이었다. 초기에 이룩된 HCCC 조직에 김준곤 목사님도 좋아하셨고, 몇 차례의 수련회도 적극 참여해 지도하셨다.
지금은 CCC한국 대표이자 국제CCC의 부총재를 맡고 있는 박성민 박사가<SOON Movement Global>총재를 맡아 미주 KCCC 후신으로 활발하게 자라고 있다.
당시 지금도 그렇겠지만 소위 서울의 일류 고교 6곳, 남자 경기․ 서울․ 경복, 여자 경기․ 이화․ 숙명에서 학생들을 선발해서 조직이 되었다. 내가 충분한 지도는 못했을지라도 HCCC 1기는 너무 훌륭한 성장을 이루었다.
한국의 정치, 경제, 과학, 외교, 복지, 제약분야에서 나라의 큰일을 담당하였고, 자랑스러운 그룹인물이 된 것이다. 예를 들어도 좋겠지만 당사자들의 사회적 정치적으로 누가 될까 싶어 숨겨두겠다.
물론 지금 HCCC 1기도 70대 중반을 넘어 노인들이 되었다. 그러나 1964년에 만들어졌던 그룹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모임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 1964년 문예지에 이어 60년 지난 2024판 기념호까지 발행한다고 한다. 나는 내가 지금 까지 살아 있다는 보람을 여기에서도 찾는다.
나는 평생을 대학 캠퍼스에서 그룹운동을 해온 사람이다. 이런 그룹은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단순한 조직체로서가 아닌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정”이라 할까 끈끈한 접합력 그 위에 위에 있는 무엇이다. 교회적인 용어로는 간단하지만 그것만도 아닌 것 같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들의 인품은 고상하고 아주 깨끗하다.
나는 이제 달려 갈 길을 거의 다 온 것 같다.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HCCC 1기를 창설했다는 사건이다.
HCCC 1기 들은 나의 꿈이요 비전이요 내 인생의 보람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들 가슴에 내가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뉴스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