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2, 2024

[역사기획/ 낙도로 간 선교사들] (2)복음선 타고 서해안 누빈 전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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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희 목사(낙도선교회 대표)

서해안 고군산군도 순회하며 새 생명 전한 최초의 복음선 선교사

한 장의 사진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조선말 황포돛배 위에 서 있는 외국인 선교사의 사진이었다. 그는 왜 배 위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황토 돛배는 무엇인가? 나는 궁금증을 갖고 이 사진의 주인공을 추적했다. 그 주인공은 선교사 전킨과 드류였다. 그리고 이 배는 서해안과 만경강, 동진강 일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구입한 복음선이었다.

전킨 선교사의 고군산 일대 선교루트를 보여주는 지도.

황포돛배에 복음을 싣고

윌리엄 M.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한국명 전위렴) 선교사는 조선에 온 미국 남장로교회 7인 선발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호남지역 선교를 위해 정탐하면서 군산을 선교전략지로 정하였다. 원래 군산 선창가에 선교캠프를 마련하였다가, 개항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거리를 정비하는 바람에 선교스테이션을 구암으로 옮겼다(1899년). 구암동산은 복음선을 정박하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전킨은 복음선을 타고 서해안 일대의 섬들과, 서해안에서 이어지는 금강 만경강 동진강을 통해 그 일대의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

이 배는 한국 최초의 복음선이다. 이 복음선을 언제 구입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전킨과 드류가 1896년 군산에 정착할 때부터 복음선을 사용했다는 기록과 그 이후 복음선 구입 내용 등으로 추정할 때 1898년 이전부터인 것은 확실하다.

고군산군도 일대 섬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한 전킨 선교사.

전킨의 선교선은 황토 돛배였다. 우리나라 배를 한선이라고 하며, 돛대가 두 개인 배를 ‘당두리’라고 부른다. 이 배는 유(U)자형으로 납작하다. 물의 깊이가 얕은 지대를 다니는데 용이해서,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우리나라 지형에 적합했다. 물이 들어오면 출항하고, 물이 빠지면 자연스럽게 정박할 수 있었다. 특히 강과 바다 연안에서 무역이나 물건 나르기에 적합하여,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쌀 500석을 싣고도 운행할 수 있는 배였다. 4대강 공사 이후 지방자치단체들이 앞을 다투어 전시한 배도 황포돛배이다.

전킨과 드류가 직접 배를 몰 수 없어, 운항하는 일은 사공들의 몫이었다. 날씨가 나쁜 날, 선교사들이 복음선을 타고 고군산군도에 복음을 전하려 하였으나 능숙한 사공을 구하지 못하여 고생했다는 선교 보고도 있다.

“…사공이 같이 배 타고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우리는 세 명의 풋내기 사공들을 태웠고 미처 강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우리는 강풍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두 명의 선원은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배가 바람의 힘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우리가 탄 배가 모래톱 위에서 심하게 흔들렸고 한 선원이 닻을 끊어버렸다. 그 닻줄은 매우 썩고 낡아 있었다.”(Reports of the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 Korea, 903, Personal Report of W. W. Junkin, p. 15.)

전킨 선교사와 의료선교사 드류를 태우고 가는 황포돛배 복음선

복음은 희망이다

드류는 의료선교사였다. 드류에게 진찰을 받으러 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전킨이 복음을 전하였다. 한 명은 의료로, 한 명은 복음으로 팀 선교를 하였다. 드류가 1901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가서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1902년 알렉산더(Alexander John)라는 의료선교사를, 그 이후 1904년에는 다니엘(Thomas Henry Daniel) 선교사를 보내주시어 전킨과 팀선교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선교사들이 찾아간 고군산도는 무녀도, 신지도, 선유도, 대장도, 관리도 등으로 이루어진 무리 섬(군도)이다. 그들은 또한 복음선을 타고 금강을 따라 서천 장항 부여 보령까지, 만경강과 동진강을 따라 옥구 익산 김제 부안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특히 전킨이 세운 교회들은 만경강과 동진강 주변에 있다. 전킨은 배를 타고가다 선착장에서 내려, 다시 말을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군산에는 구암교회와 개복동교회, 만경강을 중심으로는 만자산교회(옥구 지경리교회) 남차문교회(익산 남전교회) 송지동교회(김제), 동진강을 중심으로 봉월교회(김제) 등이 대표적이다.

봉월교회를 통해서 대창교회(김제)가 설립되고, 대창교회의 최학삼은 선유도로 가서 선유교회를 세웠다. 그러자 전킨 선교사는 대창교회 임시당회장이 되어, 1907년 최학삼을 장로로 선출한다. 전킨이 뿌린 서해안 섬 선교 씨앗을, 하나님께서는 최학삼 장로를 통해 선유교회로 열매 맺게 하신 것이다.

당시 금강 동진강 만경강 일대는 일제의 수탈지역이었다. 이 강을 통해 수탈한 물자들을 일제는 군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 그러나 전킨은 복음선을 타고 이 수탈의 경로를 통해 복음을 전하며, 고통당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복음은 희망이다.

6마일을 넘지 마시오

“6마일 이상을 넘어가지 마시오! 전킨 선교사.”

복음을 전하다 과로로 인하여 이질 등의 병에 걸린 전킨 선교사에게 선교부에서 내린 명령이다. 미국남장로교회 전주선교부는 전킨 선교사에게 미국으로 건너가 요양할 것을 권하였지만, 미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조선으로 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전킨은 사양한다.

그러자 선교부는 1904년 전킨에게 다시 군산 구암에서 전주서문교회로 옮겨 요양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추가로 사역 중심지인 전주서문교회에서 반경 6마일을 넘어 이동하지 말도록 전킨에게 지시했다. 1마일이 1.6km이니, 10km 이상 다니며 사역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전킨의 순직 후 그를 기리기 위해 미국교회가 기증한 종으로 전주서문교회에 건립한 종탑.

하지만 전주서문교회에서 목회만 하라는 명령을 전킨이 지킬 리가 만무했다. 그의 영혼에는 땅 끝을 향한 복음의 열정이 가득했다. 결국 복음에 대한 열심이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전킨은 전주를 넘어 순회선교를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전주서문교회를 서문밖에 이전 건축하는 일도 감당했다. 당시 전주 서문 앞거리에는 일본인들의 가옥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었으며, 이는 조선인들에게 위화감을 주었다. 바로 여기에다 전킨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주는 교회를 세운 것이다. 이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나라, 바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나는 상상해보았다. 성경책을 들고 이 교회로 들어오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그들의 찬양과 기도가 서문 일대에 전파되었을 때, 그들은 이미 독립된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가졌던 것이다. 전킨은 1907년 12월 폐렴에 걸린다. 1907년은 조선에 대부흥이 일어난 시기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2일, 그는 6마일을 훨씬 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떠났다.

전킨이 뿌린 복음의 씨앗으로 세워진 교회들 중 하나인 김제 대창교회.

전킨의 장례를 치른 후 미국으로 돌아간 전킨의 아내 메리 레이번(Mary Leyburn)의 요청으로 미국교회가 전주서문교회를 위해 전킨을 추모하는 종을 만들고, 그 소식을 접한 전주서문교회는 모금하여 종탑을 만든다.
1908년 12월, 전킨의 종이 서문교회 예배당에 달리고 아침과 저녁에 종이 울릴 때, 그 소리를 듣는 전주 사람들은 전킨의 사랑과 복음 앞에 머리 숙였다. 직경 90cm의 종이 울리면 20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땡! 땡! 땡!’ 어두움과 고통 속에 있는 조선 민족의 가슴 속에 전킨의 종소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또 다른 복음선 역할을 했다.

복음선 사역을 잇는 낙도선교회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복음선 중에는 OM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로고스 호프’가 있다. 국내에는 낙도선교회가 운영하는 복음선 등대호가 있다. 1호와 2호는 분당중앙교회가, 3호는 구미상모교회가 각각 기부했다. 이 배들은 섬 선교사들이 맡아 운항하며, 교회가 없는 국내 186개 섬을 다니며 복음과 생필품을 전하는 생명선 역할을 한다. 위급상황에는 수송선 역할도 한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순례자의 노래’ 중에서)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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