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성 목사 한영설교집 제6권 중에서(154)
그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몽땅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I live by the grace of God.”
그 구원의 감격을 알았기에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라고 고백 했습니다.
Apostle Paul understood the meaning of salvation. So, he would confess, “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바울이 바보입니까? 바울은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 얘기하면 잘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Was Paul a fool? Paul was an outstanding person in a worldly sense. He was a descendant of Abraham.
헬라문화의 중심지였던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냐민의 지파로 왕족 출신입니다.
He was born in Tarsus, Cilicia – the center of Hellenistic culture. He was from the tribe of Benjamin– of royal origin.
율법대로 난지 8일만에 할례 받았습니다.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으로 양반입니다. 그 당시 세계인들의 선망이었던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He was circumcised on the eighth day. He was a Hebrew of Hebrews. He was a Roman citizen – what people at the time longed to be.
그리고 청년 때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가서 당대 최고 석학인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우므로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 대단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Furthermore, when he was young, he learned under Gamaliel, the greatest rabbi of the time. As a result, he grew up to be a traditional Pharisee. From a worldly perspective, he had it all.
그러던 바울이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변해 버렸습니다.
Then one day, on the road to Damascus, Paul encountered Jesus Christ and was completely transformed. He became a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됐습니다. 세상적이고 육신적으로 빛나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 같이 여기며 인간적으로 세상의 빛나는 여러 가지들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changed man. He became a man of faith, a man of the Holy Spirit. He counted all that he had as loss. He crucified everything that the world would consider to be precious.
내려놓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가치를 두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He laid them down and abandoned them. He no longer found value in the things of this world.
그런즉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옛 사람을 완전히 죽이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며 살았습니다.
He put off his old self and put on his new self with Jesus Christ. He crucified his old self daily.
그렇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우리도 날마다 나를 죽여야 합니다. 나를 내세우면 시험이 많습니다.
That’s right. We must also crucify our old selves daily. We face temptations when we live for ourselves.
나를 내세우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내가 내 힘으로 무엇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아직 믿음에서, 은혜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Living for oneself will not get us anywhere. Attempting to do something on our own indicates that we are far from His faith and grace.
성전에서 기도할때 바리새인과 세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When praying in the temple, what was the difference between the Pharisees and the tax collectors?
바리새인은 나를 내세웠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레에 두번 금식합니다. 나는 십일조 드립니다. 세리와 같이 나쁜 짓 하지않으니 감사합니다.”
The Pharisee would focus on himself. The Pharisee would pray, “I fast twice a week. I tithe. Thank you for I am not like the tax collectors.”
사람의 눈으로 보면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나’ 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This would have normally impressed men, no? However, the Pharisee made himself the center of the prayer.
그래서 그것이 행함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책망했습니까? “화로다 너 외식하는 자여” 나를 내세우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We cannot be justified if we are wise in our own eyes.
This Pharisee had only depended on the works of the law. How did Jesus rebuke such a man? “Woe to you hypocrites.”
그러나 세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세리에게는 ‘나’ 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In tears, he said, “God, I am a sinner. Please forgive me.” The tax collector, on the other hand, could not even lift up his eyes to pray. The center of his prayer was not “I.”
그래서 주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신앙생활 바로 할 수 없습니다.
As a result, the Lord blessed him. Unless we die to ourselves, we cannot walk by faith.
그렇습니다. 부부간에도 남편은 아내를 보고 아내는 남편을 보고 ‘나를’ 죽일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That’s right. Married couples also need to pray that God would help them to die to themselves.
그래야 행복합니다. 나는 당신 덕에 살고 있어요.
This will lead to a happy marriage. The beauty of marriage is in serving one another.
부부는 서로 섬길 때 아름답습니다. 서로 섬길 때에 웃음이 있고 복이 넘칩니다. 나를 죽여야 그렇게 됩니다.
“I live because of you.” There is laughter and blessing when we serve each other. Thus, we must deny ourselves.
그런즉 이제는 날마다 죽어서 은혜의 생활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 pray in the name of the Lord that you would die to your old selves so that you may abound in His grace.
다음에 계속(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