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 챗GPT(Chat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가 인류 문명 질서를 새로 써내려가고 있다. 인터넷 상의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AI의 능력은 분명 인류문명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다. 심지어는 설교문과 기도문 등도 순식간에 작성해낸다. 우리는 이런 세상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이런 급속한 기술 발전에 편승해,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트랜스휴머니즘과 성경의 예언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도 한층 높아지고 있다.
성경은 트랜스휴머니즘 출현을 예언하고 있을까?
트랜스휴머니즘이란 뇌 칩 및 유전공학과 같은 새로운 기술과 인간의 융합을 추구하는 철학적, 과학적,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종교적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이를 통해 우리의 지적, 신체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트랜스휴머니즘은 언뜻 공상과학 소설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유명 과학자들과 글로벌 엘리트들이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세계경제포럼(WEF; World Economic Forum))의 창립자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 제안한 ‘위대한 재설정’의 핵심 요소도 바로 트랜스휴머니즘이다.
트랜스휴머니즘 옹호자들은 인간을 발전시키고 궁극적으로는 포스트휴먼 개발 목표 달성을 위해 인간 DNA 변형을 주장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디지털 신원과 연결된 칩의 인체 이식 기술을 통해 인체에 더욱 통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임플란트 형태로 신체와 더욱 밀접하게 결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주장이 ‘짐승의 표’ 예언에 비춰볼 때 매우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 증거로,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임플란트는 요한계시록 13장 16-17절(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에게 그들의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하고(16)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숫자를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더라(17))에 묘사된 대로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을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4장 10-11절(그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즙 곧 그분의 격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즙을 마시리라. 그가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으리니(10) 그들의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이나 낮이나 안식을 얻지 못하리라(11))에 따르면,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영원한 고통 속에서 구원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미루어볼 때,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나니 곧 여기에 [하나님]의 명령들과 예수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더라)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현실에 편승하지 않는 믿음의 인내가 필요하다.
많은 성경 학자들이 이 표식에 대해 여전히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표가 트랜스휴머니즘과 관련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 흥미롭다. 과연 트랜스휴머니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지 않을 정도의 유전적 변형을 통해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그러나 질병 퇴치, 노화 방지, 수명 연장 등 인간 삶의 질 향상 측면을 고려할 때 전혀 무시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그들은 가장 최근의 예로 코로나-19 팬데믹을 들었다. 고통과 죽음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가상했는가는 그 좋은 예라고 했다.
성경의 예언과 트랜스휴머니즘의 연관성은 어느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인류 미래가 겪을 환난 속에서 트랜스휴머니즘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우리는 지금 지난 22일(수) 시작된 사순절을 통과하고 있다. 오는 4월 9일 부활주일을 향해 가고 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골고다 언덕을 올랐을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시간이다.
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비록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목적이 인류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한 것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라는 것을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균형 잡힌 올바른 방향으로 향할 수 있도록 온전한 다림줄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