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
서론)
예수님의 산 위에서 하신 팔복 설교 중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마태복음 5:9)이 있다.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다.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게 되는 시금석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된 자의 정체성이 바로 평화를 갈망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자라는 뜻이다.
- 평화가 깨어진 지구촌의 실상
끊임없이 들려오는 전쟁 소식, 쉬지 않은 쏘아대는 북한의 도발 만행, 온통 뉴스를 뒤범벅 시키는 여야 정치 갈등, 아우성 거리는 노사갈등, 광화문 거리의 진보와 보수의 촛불과 태극기 집회, 오늘도 깨어지는 가정들, 자아와 갈등 속에 자살을 택하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평화를 잃어버리고 깨어진 실상의 모습들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원자폭탄의 폭발력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사악함이다”라고 말했다.
- 평화를 이루는 사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우리는 세계의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가르치거나 회유함으로써 평화를 가르치지 않는다.
일부 선의의 사람들은 모든 전쟁은 나쁘다며 평화를 위해 항의를 한다. 때때로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두 구절 성경을 인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화평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는 평화의 때가 있고 전쟁의 때가 있다고 가르친다(전도서 3:8 참조).
-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
하지만 이 세계에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 때 매우 슬프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지난 3,400년 동안 큰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겨우 268년 미만에 불과하다. 평화는 모든 사람이 재장전하기 위해 멈추는 역사의 영광스러운 순간일 뿐이다.
- 유명무실해진 유엔기구
유엔(UN)은 1945년에 설립된 지구촌의 국제적 평화 기구이다. 유엔(UN)국기는 북극의 지점에서 내려다 본 지구의 모습이다. 이 지구에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 유엔이 생기기 전에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라는 세계적 평화 기구가 이미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힛틀러가 탈퇴하여 유럽을 전쟁으로 초토화 시켰다. 역사이라 현재까지 수많은 평화기구들이 있지만 진정한 평화가 없다.
힘없는 유엔, 유명무실한 유엔을 보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보라. 안전보장 이사국인 그들의 만행을 보라. 지금도 끊임없이 도발하는 북한 정권의 악행을 보라. 그들이 세계가 염원하는 평화에 대한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각 가정의 불화와 상승한 이혼률 보라. 여야의 당쟁 싸움을 보라, 노사갈등을 현장을 눈뜨고 볼 수 없다. 자신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전쟁을 버리고 있는 영육간의 치열한 싸움을 보라. 전쟁과 싸움으로 치졸한 역사의 현장과 현실의 사태를 두고 우리는 진정한 평화의 주가 되신 주님의 말씀에 겸허하게 엎드리고 평화를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할 것이다.
- 평화에 대한 성경적 교훈
평화를 얻는 옳고 그른 방법이 있다. 우리는 평화를 경험할 수 있지만, 인간의 수단을 통해서는 안 된다.
야고보서 4장 1-2절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우리는 평화의 왕을 다른 사람들에게 데려오려고 노력해야 한다. 로마서 10장 15절은 “화평의 복음을 전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로 막힌 담을 무너뜨리시고 화평케 하셨다.
또한 화평케 하신 주님께서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 “화평케 하시는 직책” 곧 사명을 주셨다. 결코 평화를 깨뜨리는 ”불화하는 사람“,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 곧 ”troublemaker“가 되어서는 안된다.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도 “화평케 하는 자”, 영어로는 “peacemaker”가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히 발휘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긍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하는 일에 삶을 바쳐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한 화평케 하는 자가 될 것이다.
- 지금도 갈망할 “평화의 기도”
기독교 역사 중에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의 기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십자군 전쟁이다. 종교를 명분한 악하고 불의한 전쟁이었다.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명분을 가지고 살생과 폭력과 전쟁의 엄청난 죄를 서슴치 않고 자행했다.
그런데 그러한 비참한 전쟁의 상황 속에 주님 앞에 나아가 고요하게 기도하는 성자가 있었다.그가 바로 그 유명한 프란체스코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평화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결론) 결단 및 기도: 화평과 평화를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합당한 오늘의 나의 기도와 실천한 삶의 현장은 어디일까? 내 마음, 가정, 교회, 사회 공동체, 국가를 위한 평화를 만드는 자로서 겸손한 기도와 작은 행동부터 실천하자.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