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 정체성: 장로교 신조역사-
“1907년 독노회에서 한국장로교회 교리적 표준으로 ‘12신조’ 채택”
“신학·목회·선교 근본으로 작동…시대 눈높이 맞춘 새 보완 필요”
2012년 9월 1일에 설립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올해를 110주년을 맞게 된다. 장로교 정체성은 장로교 신조(信條, 일명 신앙고백서, 교리문답서)에 따라 결정된다. 신조는 교회 공동체의 총체적 신학과 신앙의 원리요, 신앙고백이다. 신조는 신앙 공동체의 믿음과 삶의 원리를 결정짓는 성경 교리의 총체, 믿음 행위의 요청이다.
장로교의 뿌리, 형성, 발전의 신학적 원리인 신조를 통하여 장로교 정체성과 개혁교회와의 상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장로교 신조가 갖는 신학적, 신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장로교 신조 형성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한다. 또한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결정지는 12신조 채택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고, 그 신조에 대한 신학적 평가와 미래적 전망과 제언을 밝히고자 한다.
1.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기원과 상관성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중세 교회의 암흑의 현장을 직시하면서 부정과 부패의 원인을 바로 교회정치와 제도에서 찾았다. 한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황정치가 아니라 교직자 상호간 평등, 지역 교회의 자율성, 그리고 교회의 연합 등을 강조하는 장로교회와 정치제도가 시대적 상황과 목회 사역 현장의 요청에 의하여 탄생하게 되었다.
특별히,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는 신학적 관점에 따라 신학적 두 지류, 즉 개혁주의와 알미니안 주의로 나뉘게 되었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주창하는 칼빈의 개혁신앙이 모체가 되었다. 반면, 알미니안 주의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지를 함께 강조하는 신학 사조로 흘러갔다.
칼빈의 개혁주의는 전 유럽의 개혁 교회의 신학적 뿌리가 되었다. 다만 영연방 교회와 유럽 대륙 교회는 각기 다른 이름, 즉 장로교회 혹은 개혁교회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즉, 영국의 청교도 신앙의 형성에 영향을 준 개혁주의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영연방 중심의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를 탄생하게 하였다.
또한 유럽 대륙 지역은 화란을 중심으로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가 세워지게 되었다. 유럽 대륙의 교회를 개혁교회라고 부른 것은 부패와 변질된 로마교회에서 개혁된 교회란 의미에서 불러지게 되었다. 영연방에서는 로마교회와 감독정치와 다른 장로회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장로교회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장로교회나 개혁교회는 칼빈의 개혁신학에 근거한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특별한 차이가 없이 출발하였다.
2. 장로교 신조의 의미와 역사적 발자취
신조는 성경 교리의 총체이다. 또한 신조는 믿음을 전제로 한 신앙 행위의 요청이다. 장로교회의 정체성은 장로교 신조에 근거한다. 또한 신조는 교회 공동체의 공적인 신앙고백이다. 신앙고백은 한 개인의 신앙고백이면서 동시에 신앙공동체의 고백으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한 지체임을 밝혀 준다. 그러나 신조는 기독교 신앙 사수와 보호를 위해 절대 필요하지만 그 권위는 성경이 갖는 절대적 권위를 갖지 못하고 항상 성경에 제한을 받으며 절대적 권위를 가진 성경에 비해 상대적임을 알아야 한다.
신조는 목회 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조는 목회 현장에서 교회의 질서와 유익, 건덕을 위해 매우 유용하며 또한 세례와 신앙 교육, 그리고 이단 방지와 척결을 위해 매우 유익하다. 특별히 장로교 목회 및 선교 현장에서는 반드시 신경과 신앙고백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며 그것이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신학적 신앙적 테두리가 됨을 알아야 한다.
신조는 시대에 따라 수많은 교리적인 논쟁과 이단사설과 투쟁 가운데 얻는 신앙 유산이다. 니케아 신경(325)은 아리우스 기독론 문제에서 야기되어 삼위일체 교리를 바로 정립되게 되었다. 또한 칼케돈 신경(451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하나님 되심과 참 사람되심을 고백하여 기독론 논쟁을 마무리 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 이후 개혁주의 원리에 따라, 벨직 신앙 고백(1561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년), 돌트 신경(1618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34~46년) 등이 채택되었다.
특별히 장로교 정체성을 마련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는 1634년 7월 1일부터 1646년 2월 22일까지 영국 왕조와 분리된 의회가 신학자 총회를 통하여 마련되었다. 영국 장로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에 기초한 교리를 채택하여 예배의식, 정치, 권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축약된 형태인 소위 12신조는 인도 장로교 신조의 모체가 되었다. 인도 장로교회의 12신조가 그대로 장로교 선교사를 통하여 한국 교회에 전달되어 한국 장로교회 신조의 뿌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한국장로교회는 영연방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및 미국 장로교의 신학, 신앙, 생활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실상 한국 장로교회의 모체 토양은 장로교회의 모체인 스코틀랜드 장로교보다는 미국 남북장로교의 신학과 신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 한국장로교회 독노회 신조 채택의 역사적 현장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한국인 장로 36명, 선교사 33명, 그리고 찬성위원 9명 등 총 78명으로 구성된 ‘조선전국독노회(朝鮮全國獨老會)’가 창립되었다. 당시 교회수는 지교회와 회당을 포함하여 1472교회, 성찬에 참여하는 교회인 수가 1만 8061명, 원입교인 1만 9791명, 교회지도자인 조사가 160명, 전도인 330명이나 되었다.
특별히 창립 독노회(참고:독노회라고 불리우는 것은 서양 장로교회로부터 독립한 한국장로교회를 의미)는 한국장로교 정체성을 결정짓는 역사적 일이었다. 대한예수교쟝로회로회회록(1907년 4~5쪽)에 따르면, 이 때 장로교회 전통의 신앙고백, 즉 12신조와 정치규칙이 채택되었고, 한국 최초 7인 목사가 안수를 받게 되어 한국인 목사에 의한 한국 장로교회가 실제로 탄생하게 되었다.
1901년 4개 장로교 선교회가 연합장로교신학교(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6년 후인 1907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같은 해 9월 17일 4개 각기 다른 장로교 선교사들이 독노회(회장:마포삼열, 부회장:방기창, 서기:한역진, 회계:이길함)를 만들어 한국 장로교회의 변모를 갖추게 되었다.
독노회 때, 한국장로교 신조 곧 12신조를 채택하는 역사적 결정이 있었다. 특기할 사실은 영국 장로교 신조의 모체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대소요리문답’을 채택하지 않고, 1904년 영국 장로교회가 인도 장로교회를 위하여 만든 12조목을 그대로 신경을 삼았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교회문답’으로 삼았다. 또한 제1회 노회록 끝부분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규칙’을 실어 한국장로교회 초기 ‘교회정치’ 원리로 삼았다.
곽안련 선교사는 1907년 독노회의 헌법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대단히 간결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적절한 때가 오면 완벽한 새 헌법을 작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라고, 또한 그는 “이 신경이 고대 장로회 모든 신경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히 증거하는 것이었고, 미국 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경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경과 기타 유명한 일곱 신경(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다나시우스 신경, 스위스 신경, 도르트 신경,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9개조 신경 등, 곽안련, 朝鮮耶蘇敎長老會信經論 참조)을 참고로 둔다”고 확대해석하고 있다.
이때 채택된 12신조를 조목별로 분석하면 성경의 무오, 하나님의 절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피조, 인간의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성령의 역사, 예정론, 성례, 성화의 삶, 부활과 심판 등이다.
4. 한국장로교 신조의 신학적 평가, 미래적 전망과 제언
12신조의 신학적 평가에 대하여 많은 이견과 논란도 있다. 12신조를 채택한 1907년 독노회 창립은 장로교회 신앙과 정치 규칙을 가진 명실공히 장로교 정체성을 확보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길선주 목사는 독노회 설립이 “크고도 신령한” 사건이며 “역사적 사건”이라 평가했다. 장로교 헌법(신앙고백과 정치규칙)을 가짐으로 정상적 형태를 갖춘 조직 교회가 되었다. 1922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성경소요리문답)이 한국장로교회 헌법에 소개 전까지 12신조는 사도신경을 제외한다면, 한국장로교회의 유일한 신조요, 절대적 교리 초석이 되었다.
1912년 9월 1일 평양에서 한국 최초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회장:언더우드, 서기:한석진, 회계:불레어) 설립되어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적 날이며 민족교회로서 전면적인 조직이 완성하게 되어, 완전한 한국장로교회가 조직되었다.
특별히 1907년 독노회가 한국장로교회의 교리적 표준으로 채택된 12신조는 여러 장로교회들이 연합하는 교리적 토대가 되었고 100년이 넘는 장엄한 세월 속에서 한국장로교 헌법의 신조라는 조항에 수록되어 진정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목회적, 선교적 근본을 이루게 되었다.
이제 한국장로교회 또 다른 1세기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한국장로교 신조가 단순히 교리적 척도로 헌법 책에 기록물로 사장되어서는 안 된다. 칼빈의 주장처럼 “교리는 교회의 기초요, 틀”이기 때문에 교리가 내포하는 진리로 한국교회를 새롭게 개혁해야 한다.
종교다원화, 포스트모던니즘 시대를 변혁시킬 수 있도록 신앙의 연륜과 신앙세대의 눈높이에 맞는 신조를 새롭게 보완 채택하여 신학적 기준과 신앙적 방향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를 진리의 터 위에 바로 세워야 하겠다.
또한 교리가 없는 맹목적 복음주의 물결에 떠내려가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개혁신학을 전수시키는 교육적 노력이 총회적으로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