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8, 2024

[총신 120주년 특별기획/ 개혁신학의 꽃으로 피어나다] (4)스승과 은인들

인기 칼럼

한국장로교 정초, 보수주의 신학 위에 놓다

박창식 목사(달서교회·대신대학교 객원교수)

1901년 평양장로회신학교로 출발한 총신이 개교 120주년을 맞았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씀이 문자대로 성취된 역사이다. 하나님 은총의 역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시대마다 쓰임 받았던 수많은 선진들의 헌신의 역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1. 신학교 정초기(1901~1938)

평양신학교는 초대교장 마포삼열이 재직하던 1924년까지는 매코믹신학교 출신 교수들 일색이었는데, 1925년 라부열이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프린스턴신학교 출신들이 가담하였다.

두 신학교는 미국북장로교 구학파 중심의 신학교들로, 당시 미국장로교회가 자유주의적 비평신학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칼빈주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아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확신하는 학교들이었다. 평양신학교 초창기 교수들은 이런 신학적 배경 하에 한국장로교회의 정초를 성경중심의 보수주의 신학 위에 놓았다.

‘한국장로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포삼열은 평양신학교의 실질적 설립자였다. 그는 평양공의회에 신학교 설립계획서를 제출하였고,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허락을 받아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방기창과 김종섭 두 학생으로 시작했지만, 그는 신학교의 수장으로 한국교회 장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학생들을 계속 모집하였다.

또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북장로교, 미국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 선교부와 협력하여 신학교를 성장시켜 나갔다. 이러한 헌신의 결과 1907년에 일곱 명의 한국인 목사가 배출되고, 이를 계기로 ‘독노회’가 설립되는 등 한국장로교회가 조직교회로 발전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제2대 교장 라부열은 더욱 강화된 칼빈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이 구축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라부열의 취임으로 프린스턴신학교 출신들이 등용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은 주로 구프린스턴 신학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평양신학교가 비록 35년 동안 8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였지만, 폐교를 하더라도 결코 신사참배는 용인할 수 없다는 점을 천명한 데서 더 뚜렷해진다.

선교 정초기에 헌신했던 많은 교수들이 있지만 특히 교양 있는 신사 기일, 목회자 곽안련, 순례자 소안론, 사랑의 목자 이길함, 숭실의 초대 학장 배위량, 구약학자 어도만, 변증가 함일돈, 전도자 사우업 교수 등은 총신의 역사에서 잊혀서는 안 될 인물들이다.

1901년 미미한 규모로 시작한 평양신학교가 캠퍼스 시설을 확충하고, 신학교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결정적 헌신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미국 시카고의 매코믹(Nettie F. McCormick) 여사였다.

매코믹 여사의 5500달러 헌금으로, 1908년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 언덕 위의 6000평 대지에 2층 한옥으로 신학교 교사가 건립되었다. 그녀는 1910년에도 2개의 기숙사 건축을 지원하였고, 다시 1912년에 1만 달러의 기금을 신학교에 지원하였다. 이뿐 아니라 1921년에는 3만 5000달러를 희사하여, 현대식 3층 건물로 평양신학교 새 교사를 완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외에도 4개 선교부가 각기 명의로 기숙사를 건축하였다. 호주선교부의 빅토리아기념관, 미국남장로교의 알렉산더기념관, 미국북장로교의 마르다기념관 등 교수들을 위한 6개의 사택, 3개의 작은 기숙사가 각국 선교부의 헌신으로 마련되었다.

선교 정초기 후반(1925~1931)에 눈에 띄는 것은 한국인 교수들이 평양신학교 교수진에 당당히 합류했다는 점이다. 남궁혁, 이성휘, 박형룡 등은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으로 선교사 일색이던 교수진에 합류한 첫 한국인이라는 점 뿐 아니라 선교의 귀한 열매라는 의의도 지녔다.

2. 해방 전후기(1945~1951)

1938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된 이후부터 해방을 전후하는 기간까지 한국장로교회는 신학교의 정립시대를 맞이하였다. 지난 40여 년 동안 지켜온 1교단 1신학교의 전통이 깨어진 것이다. 1940년에는 ‘후평양신학교’와 서울의 ‘조선신학교’가, 1946년에는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특히 김재준을 위시해 자유주의 신학으로 의심받는 자들이 주도하는 조선신학교에서 계속 학생들을 배출하는 것은 염려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 인사들은 평양신학교의 학통을 이어갈 신학교 설립을 절실한 과제로 여겼다.

이 열망을 받아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이 상경하여 1948년 서울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우선 평양신학교의 보수적 신학전통을 계승한다는 측면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의 확산에 맞서는 신학교라는 존재감으로 당시 수많은 교회들에 안도감을 주었다.

한편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자유주의 신학의 확산에 쐐기를 박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바로 ‘51인 신앙동지회’의 총회진정서 제출이다. 당시 조선신학교는 총회의 유일한 인준 신학교였다. 그런데 이 학교에 재학 중인 정규오를 위시해 51명의 학생들이 연명으로 김재준, 정대위, 송창근 교수의 성경관을 조사해 달라는 진정서를 1947년 제33회 총회에 제출한 것이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자유주의가 한국장로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주지되었고, 이후의 신학 흐름에 결정적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후 신앙동지회 회원들은 박형룡과 고락을 같이 하면서 한국장로교회의 정통 신학을 보수하는 데 앞장섰다.

보수주의 신학교를 열망하던 인사들의 도움으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는 1949년 제35회 총회에서 총회 직영 신학교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중립적인 한경직 목사의 제의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합동하기로 하고, 합동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위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합동이 성사되지 않자, 총회는 두 학교 모두를 취소하고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조선신학교가 끝내 총회 결의에 승복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택하면서. 장로회신학교가 옷을 바꿔 입는 형태로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9월 대구에서 ‘총회신학교’가 개교하였다. 총회신학교의 개교는 자유주의 신학이 도전하는 시대에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가졌지만, 이는 또한 한국장로교회 내 보수신학의 승리라는 의미도 있었다.

피난지 대구에서 시작된 총회신학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헌신을 요구했다. 왜냐하면 평양신학교 폐교 이후 오랜 세월 제대로 된 신학교가 부재한 상태였던 데다, 총회신학교는 개교 때부터 519명의 학생들이 등록하며 세계 최대의 장로교신학교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총회신학교의 대구시절은 단지 일시적인 피난신학교 수준이 아니었다. 총회 결의로 시작한 학교로서, 전쟁이라는 미증유의 상황에서도 가르침과 배움의 열정이 식지 않았다. 당시 학생들을 가르쳤던 스승들의 헌신은 실로 눈물겹다.

교장 감부열 박사는 대립하는 두 진영을 아우를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로, 극한 대립의 상황에서 학교가 연착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추후 박형룡에게 리더십을 이양하기까지 과도기적 사명을 감당하였다. 학감인 권세열은 감부열의 부재 시에 학교를 이끌었다.

특히 그는 자신이 1970년까지 이끌며 약 150만 명의 청소년들을 교육시킨 성경구락부를 통하여 신학교 재학생들에게 사역의 장을 마련해주었을 뿐 아니라, 고향을 등지고 학교를 찾아온 가난한 신학생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의 길도 열어 주었다.

총회신학교에서 박형룡 박사의 존재감은 단지 한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 그 이상이었다. 그가 가는 길에 한국장로교회의 신학교도 가고 있었다. 그는 1953년 감부열이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한 후 교장직을 사임하자, 한국인 최초로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56세였던 그는 이때부터 보수신학의 주역으로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리는 신학자요 목회자인 김치선 박사가 교수로 참여했다. 그 외 실천신학에 명신홍 목사, 소선지서에 조하파 선교사, 교회사에 계일승 교수 등이 참여하여 전쟁 중 신학교를 이끌어 갔다.

대구시절의 총회신학교를 위해 교수와 학생들이 바친 희생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지역 교회와 교계의 헌신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역교계의 도움으로 총회신학교는 교사를 신축할 수 있었다. 또한 임시 교사로 사용했던 대구서문교회 서남교회와 기숙사를 제공한 대구중앙교회 등의 도움도 컸다.

3. 에큐메니칼 분열 전후기(1959~ 1967)

1950년대 말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기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촉발된 1959년 제3차 대분열은 교단의 분열과 동시에 신학교의 분열까지 가져왔다. 당시 소위 합동교단은 말 그대로 보수신학을 지키려는 일념 하나 가지고 맨주먹으로 광야로 나선 상황이었다. 가장 시급한 현안이 신학교였다.

남산에서 운영하던 총회신학교를 철수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게 되자 에큐메니칼 측 학생들은 대광중학교로 옮겨 수업을 재개하였고, 총회 측의 학생들만 남게 되었다. 결국 1960년 3월에 남산 밑의 대한신학교를 임시 교사로 삼아 옮겨갔고, 그해 8월에 다시 용산 역전의 교사로 이전하는 등 마치 광야생활과도 같은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혹자는 당시 상황을 두고 “학교의 재정사정은 말이 아니어서 학생들이 주말이면 교회로 나가 후원비를 구걸하는 처지였다. 이쯤 되고 보니 교단의 지도자들은 모이기만 하면 돈 걱정부터 앞세워 신학교가 언제 자체 건물을 가지고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장탄식만 늘어놓았다. 무엇인가 분위기를 일신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한 때였다”고 묘사하였다.

이 시기가 어쩌면 총신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때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헌신의 역사는 가장 힘들 때 꽃을 피우는 법이다. 총회신학교 재건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눈물겹게 진행되었다. 우선 외부의 도움이 절실했는데, 사실상 총회가 외국인 선교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칼 매킨타이어가 이끄는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의 원조가 큰 도움이 되었다. 1960년 제45회 속회 총회에서 당시 ICCC의 근본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관계를 단절한 바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재정적 도움은 절실했다. 결국 이들이 원조한 10만 달러로 용산역 앞의 4층 빌딩을 구입하여 남산에서 쫓겨난 이후 처음 독립적인 교사를 마련하게 됐다. 이 일을 성사시킨 데는 서울평안교회 김윤찬 목사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총회의 허락 없이 원조를 받은 사실이 문제가 되어 추후 총회에서 정중하게 사과하는 일까지 겪었지만, 사실 당시 신학교는 이러한 후원 없이 미래에 대한 기약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61년 제46회 총회를 기점으로 총회신학교 시설 확충 및 인가를 위한 각계의 노력이 일어났다. 일단 총회는 전국교회의 주일학교 학생들까지 대상으로 하는 ‘5000만환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6년 10월 8일자 <기독신문>에 ‘인천용현교회의 손혜경 양은 머리칼을 잘라 팔아 총신신축헌금을’이라는 기사가 나갈 정도로 호응이 나타났으며, 이런 일들이 계기가 되어 신학교 건축을 위한 전국적인 열기가 뜨겁게 일어났다.

당시 총회신학교의 용산교사는 운동장은 물론 강당도 없어서 복도에 서서 예배를 드릴 정도로 학사운영에 어려움이 컸다. 이러한 때에 총신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기적 같은 헌신이 나타난다. 바로 부산 부전교회 백남조 장로가 거금 2000만원을 헌금하여 신학교 부지를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62년경 신학교 이사회가 부산 대청동의 이사장 노진현 목사 댁에서 모였을 때, 백남조 장로는 자신이 신학교의 부지를 마련해보겠다고 나섰다. 당시 백남조 장로는 표백 염색가공업체인 백흥화학공업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제대로 된 자택도 없이 공장 안 판잣집에서 노모를 모시고 생활하던 상황이었다. 그의 헌금으로 현재의 서울 사당동의 부지 1만 8000평을 구입할 수 있었다. 증경총회장 소강석 목사는 “이 눈물겨운 백 장로의 헌신은 우리 총신과 교단 역사에 불멸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한 사람의 위대한 헌신은 전 교단적인 헌신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였다. 총회는 총회신학교 신축을 위한 5개년 계획을 결의하였고, 신학교 이사회는 이 계획의 실행을 위해 기구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신학교 부지가 마련되었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교사를 세우는 데는 더욱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다. 1964년 제46회 총회는 1만 7000달러에 해당하는 254만원을 각 노회별로 배당하였고, 또한 1만 달러에 해당하는 130만원을 전국의 유지들로부터 모금하기로 하였다.

이때 백남조 장로의 헌신에 자극을 받아 교단 내의 전국의 실업인들이 소위 ‘전국실업인 신앙동지회’를 결성하며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백남조 장로를 회장으로 하고, 김인득 곽현보 우성기 양재열 권운현 방남준 김추호 정규만 박기동 김정국 장기동 박찬수 박기수 장로 등을 회원으로 하는 명망 있는 기업인들의 모임이었다. 1965년과 1966년 어간에 전국교회와 노회, 성도들의 헌금이 쇄도할 때 이들은 <기독신문>에 신앙동지회라는 별도의 항목으로 헌금에 솔선수범하였다. 이런 헌신은 교단 내의 새로운 헌신을 이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다.

실업인신앙동지회는 국외의 원조도 이끌어 낸다는 목적으로 명신홍 목사를 미국으로 파송하여 협력을 도모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총회신학교의 신축을 위한 명신홍 목사의 눈물겨운 헌신을 접하게 된다. 명신홍 목사는 1963년 8월에 직장암으로 네 차례나 수술을 받는 투병 중에도 목숨을 개의치 않고, 자신이 졸업한 칼빈신학교가 소속된 미국개혁파 교회의 협조를 구하기 위하여 출국하였다. 표면적인 목적은 미국개혁파 교회와의 친선관계 수립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신학교 건축을 위한 모금이 주된 사유였다. 그는 1년 7개월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각계각층에 신학교 신축 5개년 계획을 설명하고, 필요한 자금 원조를 호소하여 총 5만 달러의 헌금을 약속받았다.

1966년 2월에 미국개혁장로교회 친선위원회로부터 총회신학교 신축을 돕기 위해 헌금하기로 약속했던 3만 달러의 모금이 완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해 3월 중순부터 다시 공사가 진행되었다. 추가로 1만 달러가 개혁장로교 총회의 한국주재 대표인 볼렌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송금될 것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헌신의 결과 총회신학교 구관이 신축되었다. 지금은 허물어지고 종합관이 들어선 자리이지만, 당시 총회신학교 건물은 관악산을 굽어보는 자락에 동양 최대의 신학교 교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규모였다.

2000년 4월 26일 총신 100주년 기념교회당 기공식 당시의 총회와 총신 지도자들.

4. 비주류와 합신의 분열시기(1979~ 1980)

1970년까지 총회의 교권은 황해도와 호남 출신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그러다 주도권이 영남과 평안도 출신 인사들에게로 넘어가면서, 기존의 인사들은 소위 비주류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들은 옛 총신을 복구한다는 명분 하에 방배동에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1979년 제64회 총회에서 ‘개혁측’ 교단으로 분립했다.

비주류의 분립으로 인한 어려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총회에는 또 한 번의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그것은 총회 지도부와 총신신대원 교수들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교권을 장악한 이영수 목사를 위시한 총회지도부와 총신교수들 간에는 갈등이 잦았다. 그러다 총신대 학장으로 젊은 정성구 교수가 임명되자 이를 계기로 중진교수들이 일부 학생들과 함께 이탈하였고, 박윤선 박사도 여기 합세하면서 소위 ‘합동신학원’이 설립되고 이를 중심으로 ‘합신측’이라는 교단이 형성되었다.

특별히 박형룡과 더불어 총신의 신학적인 지주였던 박윤선 박사가 합신으로 가게 된 것은 총신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아픔이요, 애석한 일이다. 당시 박윤선 박사의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박형룡이 조직신학자로 리더십을 발휘했다면, 박윤선은 성경학자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의 신구약성경 주석을 읽지 않은 한국의 목사가 있었겠는가.

박윤선은 주경학자로서 역사적 전천년설에 입각하여 칼빈주의의 노선에서 신학을 펼치며, 한국장로교회 안에 칼빈주의적 복음주의 신학과 신앙을 글과 가르침과 삶을 통하여 확실하게 심어주었던 것이다. 당시 박윤선과 함께 총신의 리더십을 이끌었던 인물로 김희보 간하배 김의환 차영배 등이 있다.

초대학장 박형룡 박사의 뒤를 이어 제2대 총신대 학장이 된 김희보 교수는 깊이 있는 구약학 강의로, 탁월한 강해설교 중심의 목회자들을 배출하였으며 학교의 구약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학장 재임 시에 만년 적자였던 학교 재정이 흑자로 전환됐고 기숙사와 신관의 건축, 여러 학과들의 증설, 학교명칭의 총회신학대학에서 총신대학교로 변경 등이 이루어졌다.

주류와 비주류가 갈등을 빚을 때 총신 교수들은 ‘총신의 신학적 입장’을 <신학지남>에 공개적으로 밝히며 흔들림 없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당시 비주류에서는 총신 교수들이 문서설주의자, 신복음주의자, 불트만주의자, 신정통주의자라며 신학적으로 좌경화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1979년 교수회는 선언서를 통하여 “개혁주의 전통과 복음주의 유산을 물려받은 총신”으로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총신이 개혁주의 신앙노선에 있음을 밝혔다. 당시 교장 박윤선을 중심으로 김명혁 박형용 신복윤 신성종 차영배 윤영탁 김득룡 정성구 등의 역할이 컸는데 합동신학교로 분열되기 전의 교수진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였다.

5.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소위 비주류와 합신의 분립 이후 총신대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분으로 차영배와 김의환을 들 수 있다. 차영배는 화란 개혁주의 신학을 총신에 소개하고 정착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삼위일체론과 성령론에 대한 깊이 있는 논문들을 발표함으로, 역사적 칼빈주의 전통에서 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별히 그의 성령론에서 오순절의 연속성에 대한 강조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합동신학교로 주축 교수들이 이탈해 나간 혼란기에 학교 행정의 실무를 맡아 잘 수습하였다. 또한 목회학 석사과정(M.Div.)을 신설하고 신학박사 학위 과정을 교육부로부터 받아내기도 하였다.

김의환은 미국 복음주의 운동의 신앙과 흐름의 전반을 총신에 소개하여, 선교적 열정과 목회적 열정을 불어넣었다. 특히 학생들에게 WCC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는 다른 차원의 본래 교회 선교를 강조하는 복음주의 해외선교운동에 대한 도전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총장 재임 중 1995년 사당동 종합관 건축, 1996년 선교대학원 인가, 제2생활관 신축, 교육대학원 인가, 아동학과 신설 등으로 학교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즈음 총신의 역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일은 경기도 용인의 양지캠퍼스 조성이다. 이 일은 1980년 제65회 총회장인 이영수 목사의 리더십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영수는 총신대학교 분교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부지를 물색하던 중에 용인의 임야 22만여 평을 매입하게 되었다. 1982년 6월에 양지 제1교사 기공식을 가졌고, 이듬해 5월에 1000평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연건평 1470평의 규모의 건축이 이루어져 오늘의 양지캠퍼스가 되었다.

이영수 목사의 공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서로 다르지만, 어쨌든 그가 총신대학교의 발전에 미친 공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총신대학교는 1990년대 들어와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정도의 우수한 학교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2002년에는 양지캠퍼스에 총신100주년 기념예배당이 건축되었고, 무엇보다 우수한 교수진이 확보되며 세계에서 빠지지 않는 개혁주의 신학의 도량이 되었다. 개교 120주년을 맞이하면서 총신대학교는 변화무쌍한 현실 속에서 내외적으로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총과 전국교회의 헌신과 성도들의 기도에 힘입어 계속 순항할 것이라 확신한다.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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