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보통 상대주의를 선호한다. “절대자 하나님, 절대적 진리”라는 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주의는 흔히 열린 마음과 관용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상대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도 절대적 진리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열림과 관용을 “절대로”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근본주의자” “보수 꼴통” “극우”라는 표현을 써가며 매도하기 일쑤다.
이것이 상대주의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자기모순이다. 상대주의 원리를 따르자면, 당연히 절대적 가치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열림과 관용을 가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 반대인 것이다. 왜 그런가? 상대주의는 모든 진리를 상대화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상대주의자들도 상대주의 자체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에 엄격한 상대주의란 원래부터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절대주의를 싫어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도 있다. 흔히 절대주의가 갖기 쉬운 오만, 독선의 위험이 그것이다. 역사상 자기중심적인 절대주의로 해악을 끼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같이 자기중심적인 절대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고 성경적인 절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점검이 필수적이다. 절대자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모든 인간에게 회개, 겸손, 사랑, 용서 등 하나님 말씀을 통한 자기 성찰의 필수성을 철저히 강조하신다. 따라서 성경적인 절대주의자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과 성경 말씀의 진리를 절대화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2장에서 세 가지 세계관을 교훈하고 있다.
첫째는 자연주의적 인본주의(Naturalistic Humanism)다. 이것은 “과학 절대주의” 또는 “합리적 세속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바울은 이를 “세상의 지혜”라고 표현하면서 이 지혜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세상의 지혜”는 인간 이성과 그 이성이 발견한 자연과학을 최종적인 절대권위로 신봉한다. 즉, 인간 이성에 기초한 세계관만을 절대화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는 오만한 이성주의 사상인 것이다.
둘째는 그릇된 신비주의(False Mysticism)다. 미신적인 샤마니즘과 비성경적인 신비적 체험을 강조하는 주관주의가 이에 속한다. 모든 주관주의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 의해 심사를 받아야 한다. “신은 만물이고 만물은 신이다”라고 믿는 범신론(Pantheism)과 자연을 숭배하는 물신론(Animism), “모든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몰몬교와 뉴 에이지(New Age) 사상들도 모두 그릇된 신비주의에 포함된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상을 “우상숭배”라고 했다. 이 모든 그릇된 신비주의 사상들 속에는 자력으로 어떤 신비의 세계로 상승하려는 이기적인 욕구가 내재되어 있다.
셋째는 초자연적 유신론(Supernatural Theism)이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불렀다. 하나님을 초월적인 창조주요 절대자로 믿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성을 다 이해할 수 없는 피조물의 유한성을 겸손히 시인한다. 이것이 성경적 세계관이요 유대-기독교적 유신론(Judeo-Christian Theism)이다. 키엘케고르는 이를,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근본적으로 다른 질적 차이가 내재함을 인정하는 세계관”이라고 했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점에 대한 인정을 거부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 먹었던 아담과 이브는 타락하여 결국 인류를 파국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에게 계시해 주고 있다. 성경적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죄의 문제와 고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떠날 때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는 구원은 인간의 합리적 두뇌나 세상적 지혜, 그릇된 신비주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구원은 절대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미련한 것”으로 보아 왔다(고전 1:19). 창세기 시절부터 인간은 “세상의 지혜”로 하늘에 오르고자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 인본주의적 존재다. 인간의 힘으로 지상에 이상향 유토피아(Utopia)를 건설하는 것이 인본주의의 오랜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번번이 실패를 반복했다. 유토피아라는 말의 Greek어 어원을 보면 유(Ou) 토피아(Topos), 즉 “No Place”이다.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가, 이 세상에 인간의 힘으로 세울 수 있는 이상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자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고 인본주의를 선택한 인간들은 주체적인 인간의 힘으로 지상낙원 건설이 가능하다고 어리석게 외쳐왔다.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자들은 칼 맑스의 유물론(Materialism) 사상으로 이상적인 공산사회를 꿈꿔 왔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70년도 못 돼 무너진 바벨탑이 되었고 인류에게 막대한 피해만을 입히고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오직 물질이 인간 운명을 결정한다”는 물질 절대주의 유물론을 믿어왔던 공산국가의 인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모두 “물질”때문에 제일 많이 고생하고 있다. 이러한 유물론의 실패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역사(History)는 역시 하나님의 스토리(His Story)임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2월 셋째 월요일은 “대통령들의 날”(Presidents’ Day)이다. 대통령이 취임할 때마다 성경 위에 손을 얹고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So Help Me, God!)라고 선서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진 나라가 미국이다. 맑스의 유물론을 믿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말을 화폐에 새겨 놓은 미국은 그동안 분명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아 온 나라임에 틀림없다. 앞으로도 미국이 상대주의, 인본주의, 물질주의, 세속주의에 기울지 않고 건국 초기의 신앙과 이념을 굳게 지켜나가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 모두 합심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미 오래 전에 이 절대적 진리를 선포하셨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