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앞두고 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마지막으로 들어가신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을 경축하는 주일이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들어가실 때 예루살렘 군중들은 자기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찬양하며 열렬히 환호하였다.
그러나 그날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착잡한 날이었다. 그 날에는 환영의 함성이 울려 퍼졌지만, 며칠 후엔 “강도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를 외치며 돌변해 버린 군중의 배신과 십자가 죽음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의 왕이시여!”라고 했던 종려주일 군중과, 빌라도 법정에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쳤던 목요일 밤의 군중은 서로 다른 군중이었을까? 아니면 같은 군중이었을까?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성경에 없다. 아마 같은 군중들 속에 새로 합류한 군중들이 혼합돼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불과 며칠 사이에 군중의 태도가 이토록 돌변할 수 있었을까?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2장에서 군중들이 예수님께 호산나 찬송으로 환호한 이유를, 바로 그 직전 11장에서 군중들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요 12:18)고 밝히고 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부활의 표적과 함께 평소에도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 내시고, 군중을 먹이시는 능력을 보았고,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민족적 메시야로 기대했기 때문에 그렇게 환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며칠동안 행하셨던 일들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이를 본 그들은 이제, 환영의 군중으로부터 증오의 군중으로 급변하였다.
4복음서 기자들은 그 한 주간에 일어났던 일들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복음서 전체의 3분의 1의 분량을 할애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만큼 그 한 주간의 사건이야말로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복음의 절정이요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월요일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을 채찍으로 쫓아내시고 성전을 깨끗이 하셨다. 그리고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 나무(불신앙의 이스라엘 상징)를 저주하셨다. 화요일에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힐난함을 논박하시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자신의 재림을 예언하셨다. 그날 밤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 기름 부음으로 헌신했다. 수요일에 가룟 유다는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체포할 음모를 꾸미느라 바빴다.
목요일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유월절 만찬을 최후로 드시고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그 자리에서 가룟 유다의 배신을 폭로하시고 책망하셨다. 베드로의 비겁한 부인도 예고하셨다. 그리고 늦은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셨다. 밤새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금요일 이른 새벽에 배신자 가룟 유다를 앞세운 로마 군병들에 의해 체포되시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심문을 받으신 후 로마 총독 빌라도 법정에 서셨다. 군중들의 조롱과 비난 가운데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네덜란드를 대표했던 최고의 화가 렘브란트는 성화를 많이 그리기로 유명했다. 그는 생전에 800점의 성화를 그렸다. 그의 모든 그림들이 미술사에서 보석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장엄하고 강력한 표현력의 작품”으로 불리는 “세 개의 십자가”(The Three Crosses)라는 제목의 그림은 특히 유명하다. 이 그림 중앙에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가 서 있고 그 좌우편에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을 퍼붓는 군중들의 모습이 매우 어둡게 그려져 있다.
렘브란트는 마태복음 27:46-54 말씀을 묵상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절규에 가슴이 뭉클하여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 전체가 찐한 어두움에 감싸여 있지만, 위로부터 내려오는 밝은 빛 한 줄기는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인류 구원의 소망과 예수님의 부활의 승리를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 우측 아래 모퉁이에 어둔 그림자에 가려 겨우 알아 볼 수 있는 얼굴이 하나 그려져 있다. 미술가들은 이 사람을 렘브란트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으로 생각한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동참한 군중과 같은 죄인임을 간접적으로 고백했던 것이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묵상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일 것이다.
그와 아울러 우리가 렘브란트처럼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 자신도 그 포악하고 어리석은 군중 속의 한 사람처럼 지금 살고 있지는 않는가”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잊지 않으면, 우리는 이 고난주간에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옷깃을 여미면서 더욱 더 주님께 헌신된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하게 될 것이다.
종려주일의 군중처럼 오직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눈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보았다가 자기 기대에 어긋나면 여지없이 배반하는 신자가 되지 말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하네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하네” 신앙고백의 찬송을 부르며 굳건한 믿음을 재 다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통의 금요일은 “Good Friday”가 되고, 고난주간(The Passion Week)은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위대한 주간”(The Great Week)이 되어질 것이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고난주간을 “위대한 주간”으로도 부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