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인간 이성은 대립적인가?”
신앙과 이성은 대립적인가? 그렇다. 에덴 동산 이후, 신앙과 인간 이성은 항상 대립되어 왔다. 이성이 발달 할수록 신앙은 평가절하 되어졌다. 인간 이성을 중시한 고대 희랍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17세기 데카르트와 칸트의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로 꽃을 피우며 18세기 후반 계몽주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성주의(Rationalism)는 우주의 모든 진리를 오직 인간 이성으로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즉 이성을 모든 지식의 근본으로 본다.
물론 이것은 성경의 교훈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고 말씀한다. 인간 이성을 내세워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자를 “미련한 자”로 성경은 규정한다.
기독교는 이성을 배척하지 않는다.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과학을 부단히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과학의 절대화와 세속화를 반대한다. 과학의 세속화란 인간 이성 만능주의를 믿으며 하나님을 배제한 과학을 말한다. 성경에서 보는 이성은, 인간의 전적부패로 인해 죄로 오염되고 제한된 이성이다. 그래서 17세기 유신론적 철학자요 과학자, 수학자였던 파스칼은 “신앙은 타락한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이와같이 죄로 오염된 이성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겸손히 내려 놓을 것을 요구한다. 신앙은 여기서 비로소 시작된다. 신앙의 사람이 되면, 나의 이성은 스스로 충분하다는 “자기충족적인 이성”(Self-Sufficient Reason)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성”(God-Given Reason)으로써 만물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류 역사를 보면,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이 수없이 많다.
이런 관점에서 11세기 신학자 안셂(Anselm)은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I believe in order to understand)”라고 고백했다. 먼저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면 그 다음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믿을 때 영의 눈이 열리고 그 분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게된다. 이전에 몰랐던 진리를 깨달아서 그 입술에서 “아멘, 할렐루야!”가 터져 나온다. 그렇지 않고 죄로 오염되어 유한한 이성으로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초자연적 영적 진리와 광대한 우주 만물의 원리를 결코 올바르게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전기 기구가 전원에 연결되어야만 작동될 수 있듯이,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영적으로 연결되어야만 그 인생이 온전하게 작동될 수 있다. 하나님과 올바르게 연결된 영적 관계를 갖지 않고 자가 발전기를 돌려 인생을 운행할려고 하면, 결국은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교만, 실패, 좌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사상가 에머슨은 “내가 만물의 운행을 보면 볼수록 만물은 나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만든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하는 것도 보게 된다”라고 고백했다.
성경은 인간의 무지 가운데 가장 큰 무지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영적 무지”라고 지적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인생을 얼어 붙게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냉소와 무지이다. 반면에, 인생을 따뜻하고 활기차게 하는 것은 신앙의 힘이다. 신앙은 인생의 원동력이다. 나무의 열매가 있기 전에 싹이 트듯이, 모든 인생의 열매가 있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 신학계에 신앙보다 인간 이성을 높이는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사상이 침투하여 얼마나 신학적, 영적 폐해를 끼쳐 왔는가?
목회자 양성 기관으로 출발한 하바드 신학부는 청교도적 칼빈주의를 벗어나 프랑스 계몽주의 산물인 이신론(Deism)을 받아 들이고 인간 이성의 능력을 강조하는 알미니안적 자유주의(Arminian Liberalism)와 유니테리안 사상의 신학교가 되었다. 유니테리안주의(Unitarianism)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신성과 대속적 죽음, 인간의 전적부패를 인정하지 않는 비성경적 종교 사상이다.
프린스턴 신학교도 마찬가지다. 스카트랜드 출신 장로교 목사인 존 위더스푼은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유일한 성직자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뉴저지 대학(현 프린스턴 대) 총장으로 부임한 후 스카트랜드 계몽주의 철학에 바탕한 경험주의를 주창하며 성경계시와 이성은 충돌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그는 인간의 전적부패 교리를 부인하고 인간에게 도덕적 행동을 할 본성적 능력이 있다는 알미니안적인 “도덕 철학”(Moral Philosophy)을 주창했다.
그는 성경과 이성이 동등한 위상에 있다는 교육철학을 프린스턴에 도입하여, 원래 보수적 목회자 양성 기관이었던 프린스턴신학교가 현대주의와 자유주의로 흘러가도록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프린스턴 신학교가 이렇게 되자, 1929년 그레샴 메첸, 코넬리우스 반틸 교수 등이 프린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에 어거스틴-칼빈으로 이어지는 성경적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에 기초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일 신학부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원래 예일 대학은 영적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의 주역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청교도적인 칼빈주의/개혁주의를 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외손자 디모디 드와이트가 예일대 총장으로 22년간 재임하면서 정통적 칼빈주의 신학을 수정한 “뉴헤이븐 신학”(New Haven Theology)이 등장했다. 뉴헤이븐은 예일대학이 위치한 타운 이름이다.
드와이트의 제자이며 뉴헤이븐 신학의 핵심 인물인 테일러 교수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죄를 반대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아담의 원죄론과 전적부패 교리로부터 벗어난 것이었다. 이와같이 예일대학도 원래 칼빈주의 신학 전통에서 출발했지만, 인간 이성에 대한 강조로 인해 알미니안적 뉴헤이븐 신학으로 옮겨간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봤을 때, 성경적 신앙보다 인간 이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던 미국의 유수한 신학교들이 결국은 오늘날 모두 포스트 모더니즘적 상대주의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신학교로 변질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본질적으로, 에덴에서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성경적 신앙은 대립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이 성령으로 겸손히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갈 2:20; 엡 4:22-24)이 되면, 인간 이성은 하나님의 지혜를 본 받은 이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류 사회에 크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