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October 17, 2024

[황현조 박사 칼럼] “불가능성 속의 가능성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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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조 목사(IRUS 교수, 커네티컷비전교회 담임)

“불가능성 속의 가능성을 보다”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문필가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알베르트 까뮈는 “부조리의 철학자”(A Philosopher of Absurdism)로 알려져 있다. 즉, 그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The Absurdity of Human Existence)을 부단히 파헤친 학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부조리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불가능의 현실을 의미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절대적이고 명확한 진리를 찾는 노력은 번번히 좌절 당해 왔다.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그 자체가 그에겐 부조리다. 뿐만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살이가 따분하고 늘 동일한 일상이 반복되어 다람쥐 쳇바퀴도는 것과 같은 단조로운 것 역시 부조리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은 인간에게 무의미와 권태감을 갖다 줄 뿐이다. 따라서 이런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에서 과연 인생을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까뮈가 본 인생이다.

여기서 인간은 다음 세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첫째, 인간 실존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님을 믿거나. 둘째, 인생의 무의미와 무가치를 심히 고민하다가 자살로써 삶을 포기하든지. 셋째, 인생 부조리가 존재함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그것에 반항하여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하든가… 까뮈는 이 중에서 세번째 길을 선택하라고 권유한다.

까뮈는 그의 “부조리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희랍의 “시지프스의 신화”(The Myth of Sisyphus)를 그의 책에 가져와서 부조리한 인생의 좌절과 고통을 묘사한다. 그 책에서 그는, 인생살이란 마치 시지프스가 받는 형벌의 삶과 같다고 기술한다.

희랍의 도시국가 고린도의 왕이었던 시지프스는 희랍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형벌을 받게 된다. 제우스를 비롯한 희랍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내린 형벌은 가장 재미없고 아무 가치도 없는 중노동형이었다. 그 중노동형이란, 시지프스로 하여금 큰 바위를 산 정상으로 계속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온갖 힘을 다하여 바위를 밀어서 산 꼭대기를 향하여 올라갔다. 정상에 다다르는가 했더니 그럴 때마다 바위는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 계속 벌어지는 것이다.

시지프스는 굴러 내려간 바위를 다시 정상으로 밀어 올리기 위해 산 밑으로 터벅터벅 내려간다. 이런 중노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고통을 그는 감수해야만 한다. 어떠한 성취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고, 지극히 단조롭고 부조리한 노동을 시지프스는 되풀이 해 나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망없는 형벌을 그는 묵묵히 감내해 갔다.

까뮈는 시지프스의 이러한 정신을 “불가능성에서 가능성”을 찾는 정신으로 찬양했다. 이 세상에 만연한 부조리에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맞서 계속 싸우는 시지프스야 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까지 그는 표현했다. 까뮈는 바로 이러한 시지프스의 정신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부조리한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지프스의 정신은, 일찌기 스피노자가 말한 “불굴”(Fortitude)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부조리와 불가능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함을 통해 그의 운명을 넘어서는 정신이다. 그럴 때, 굴러 떨어지는 바위는 그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못한다. 그 형벌도 더 이상 형벌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형벌을 내린 제우스 신에 대한 반항이자 승리이기도 하다. 부조리를 직시하고 부조리의 벽을 뚫고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곧 “시지프스의 실존”이다. 외부의 도움없이 오직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일궈내는 것—이것이 까뮈가 말하는 소위 “시지프스의 실존적 행복”인 것이다.  

그런데 까뮈의 이러한 “실존적 행복 사상”에 커다란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그의 근본적인 사상적 오류는, 그가 앞서 제시한 세가지 선택 중에서 첫번째 선택—“인간 실존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님을 믿는 선택”을 부정했다는 점이다. 대신에 그는, 오직 인간의 반항적 의지와 불굴의 정신으로 이 세상의 부조리와 자기 운명을 극복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세번째 선택을 수용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까뮈의 사상 속에 내재한 극심한 무신론주의(Atheism)와 인본주의(Humanism)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까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나 내세에 대한 소망이 부조리의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반항적 의지만이 해결책이라는 지극히 인간 찬양적인 인본주의 사상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불가능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성취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역시 노벨 문학상을 1970년에 받은 러시아 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원래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는 스탈린 시대 반정부 작가로 낙인 찍혀 강제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거기서 얼굴에 전혀 생기없고 무표정한 죄수들이 매일 무의미한 중노동을 반복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보고 그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이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무의미, 무가치, 단조로운 강제 노동의 부조리를 목도하면서, 까뮈와는 달리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를 선택하고 기독신자가 되었다. 기독신자가 된 솔제니친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생의 목적은 번영이 아니라 영혼의 성숙에 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하나님을 붙들 때, “불가능성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기억에 남은 이런 미국 격언이 있다.  “The End of Human Being is the Beginning of God!”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까뮈처럼 인간 찬양이 아닌, 엘 샤다이(El Shadai)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인류가 될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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