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September 10, 2024

[황현조 박사 칼럼] “믿음이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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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조 목사(IRUS 교수, 커네티컷비전교회 담임)

“믿음이 중요한 이유”

언어, 문화, 관습, 인종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 사는 이민자의 삶에는 여러 장벽들이 많다. 그래서 이민생활은 힘들다고 말한다. 이민생활 뿐만이 아니다. 인생 자체가 쉽지 않다. 각종 외부적 장벽들이 빈번하게 우리 삶을 도전한다. 보다 더 큰 도전은 외부적인 것 보다 내부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있다. 많은 스트레스와 절망과 실망감이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의 극복을 위해 사람들은 해결책을 강구한다. 알콜, 마약, 여흥, 스포츠, 취미생활 등… 하지만 그것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모두 한계성과 일시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근본적 해결책은 오직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해결 방법을 성경을 통해 알려 주셨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인생을 살 때 초자연적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은 절대적이며 경험론적 진리다. 영국의 자유주의자이며 경험주의 인식론의 철학자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el)은 기독교에 몹시 비판적인 무신론자였다. 그는 소위 “인간의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쓸 정도였다. 그가 인생 말년에 영국 BBC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기자가 질문했다. “선생님은 이제 별세하실 날이 가까와 오는데 무엇을 의지하고 사십니까?” 러셀은 힘없이 대답했다. “나는 냉혹하고 피할 수 없는 절망 밖에 의지할 것이 없습니다”(I have nothing to hang onto but grim and unyielding despair).

얼마나 절망적이면서도 또 솔직한 대답인가? 초월적 하나님을 부정하고 현세적인 것, 경험적인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던 유명 철학자의 입에서 마지막에 나온 말이다. 인간이 좁쌀만한 자기 이성과 자연주의적 경험에만 의존하고 산다면 절망 밖에 남는 것이 없다. 그것이 무신론적 세계관이 가져다 주는 필연적 비극이다. 그러나 초월적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기독교적 세계관은 절망을 거부한다. 그 진리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25).

더 나아가서 바울은 현실의 장벽과 절망을 뛰어넘을 수 있는 “궁극적 소망”에 대해서 자세한 서술을 계속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성경은 절망을 극복하는 힘의 원천이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있음을 특히 강조한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요 15:5)라고 하셨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산다. 푸른 잎이 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는 말라서 죽을 수 밖에 없다. 예수 안에 있지 않는 사람의 삶이 그렇다. 생명력이 없고 메마르고 고달프다. 절망감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이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The Sickness Unto Death)”이라고 표현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주님을 믿어도 이 세상에서 환난을 종종 당할 때가 있다고. 예수님은 신자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환난의 면제권을 보장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환난을 이기고 소망 속에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0). 십자가 고난을 이기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바울에게도 “고난의 가시”(A Thorn of Torment)가 있었다. 그는 그 가시를 없애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은 가시를 제거하지 않고 이런 응답을 주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바울은 이러한 주님의 고난 처리방식에 불평하지 않았다. “도리어 기뻐하고 자기의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리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고난이 있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 믿게 되고 주님의 능력이 연약한 자신에게 머물게 되는 오묘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크게 기뻐하고 감사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의 잘난 것 의존하고 뽐내며 살다가 결국은 낭패와 절망에 빠져버린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굳게 믿고 그분과 항상 동행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삶에 승리와 기쁨은 그럴 때 찾아 온다. 우리에게 “믿음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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