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어느 마을에 아주 신앙 좋은 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큰 소리로 표출하는 분이셨다. 자기 집 앞 계단에 서서 “Praise the Lord!”라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크게 외치곤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옆집에 사는 이웃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는 할머니가 날마다 외치는 소리에 화가 나서 “There is NO God!”이라고 늘 맞받아쳤다.
할머니의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그는 “하나님이여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세요!”라고 날마다 기도했다. 어느 날 아침 문 밖에 나갔을 때 “이게 왠 일일까?” 식료품이 가득한 그로서리 백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기뻐 하나님께 감사하며 “Praise the Lord!”라고 연거퍼 외쳤다.
바로 그 순간 옆집에 사는 무신론자가 뛰쳐 나와 소리쳤다. “하하 그봐요 할머니, 내가 하나님은 없다고 그랬잖아요? 그 식료품은 내가 사서 할머니 집 문 앞에 갖다 둔 거요”라고 깔깔대며 조롱했다. 이때 할머니는 두 손으로 박수를 치며 또 다시 “Praise the Lord!”라고 외쳤다. 그러고선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에게 많은 식료품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무신론자로 하여금 페이하도록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Praise the Lord!”
무척 유모러스한 일화이지만 여기에는 교훈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할머니를 몹시 싫어한 옆집 무신론자는 자기 돈으로 식료품을 사서 할머니의 신앙을 조롱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할머니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졌다. 평소에 우리가 사랑하고 암송하는 구절이 아닌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만물의 주관자이시다. 인간들은 미처 다 알지 못하지만,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그 배후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셔서 다스리신다.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그 대상을 “모든 사람에게”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라고 제한하고 계심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성경은 일관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대상은 제한적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인류의 일부만 제한적으로 사랑하고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보편적으로 사랑하고 다 구원하신다”는 소위 만인구원론(Universalism)을 내 세운다. 만인구원론은 주후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오리겐으로부터 시작하여 16세기말의 알미니안주의,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니테리안주의로 흘러 내려 왔고, 20세기에 와서 칼 발트의 신정통주의에서 주장하는 만인화해론과 위르겐 몰트만의 만인구원론적 ‘희망의 신학’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비성경적인 주장들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46에서 “악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만인 구원이 아님을 분명히 교훈하셨다. 신구약 성경의 요약이며 “작은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 3:16에서도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즉 독생자 예수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고 구원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하나님은 무신론자나 불신자를 보편적으로 다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론은 “제한적 구원론”(Particularism/ Limited Atonement)이요, 이것이 칼빈-개혁주의 신학의 5대 핵심 교리 중 하나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인생을 살아갈 때 항상 평안하고 좋은 일만 만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탄 배도 험란한 폭풍우를 만났다. 악한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항상 삼킬 자를 찾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 당하며 눈물 흘릴 때도 적지 않다. 욥을 비롯한 성경 속의 여러 성도들이 그러했다. 오늘날도 그러하기에 “우리가 아플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Where is God When It Hurts?)라는 필립 얀시의 책이 수백만권 팔릴 정도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염려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의 인생 항해가 때로는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하게 될 것을 확신하며 담대하게 파도를 헤쳐 나가야 한다.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게 하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폭풍우 후에는 무지개가 뜨고, 어둔 터널 끝에는 광명이 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한 다윗의 시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준다(시 30:5).
사순절 기간이다. 우리 주님의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은 세상에 없다.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에서 주님은 피와 물을 쏟으셨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최고의 사랑이었다. 주님은 죄인들의 엄격한 재판장도 되시고, 동시에 사랑의 변호사도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Fear)해야 하고, 동시에 전심으로 그분을 사랑(Love)해야 한다. 주님을 향한 Fear & Love를 우리가 동시에 가질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인정받게 되고, 우리 삶 속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 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