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October 17, 2024

[황현조 박사 칼럼]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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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조 목사(IRUS 교수, 커네티컷비전교회 담임)

“그리움”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한 대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몹시 그리워하고 천국을 사모했던 사람이었다. 바울 서신의 키워드(Key Word)는 “그리스도 안에서”(En Xristow)였다. 얼마나 주님을 그리워했던지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하겠다고 선언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이처럼 예수님을 그리워했던 바울이 예수님이 계신 천국을 간절히 사모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 그는 천국이 자기의 본향인 것을 철저히 믿으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 바울 일생의 전부였다. 바로 거기에서 그의 열정적인 복음사역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리움과 기다림은 모든 인간이 가진 공통된 감정이다. 어려서는 어른이 그립고 나이 들면 젊은 날이 그립다. 뜨거운 여름이면 하얀 눈이 그립고, 겨울이면 푸른 여름바다가 그립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다시 만나고파 그립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족, 친구, 연인, 스승, 제자, 목회자, 교인 등 모두가 그리움과 기다림의 대상이다. 실향민들은 두고온 북녘 땅을 그리워하며 “그리운 금강산”을 애절한 마음으로 부른다. 천재 시인 김소월은 그리움을 담은 시를 수없이 썼다. 사모하는 임을 그리워하며 “못잊어.”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그리워서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당신을 하도 못잊어 그리워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납니다”라는 등등의 주옥같은 “그리움”의 시를 써서 한민족의 심금을 울려왔다.

흔히 그리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통”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리움과 기다림은 지루하고 지긋지긋한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움과 기다림은 설렘을 주고 만남의 기대를 주는 희망의 시간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그리움과 기다림은 고통도 되겠지만 그 고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통이 되며 미래를 바꿀 긍정 에너지가 된다. 신자가 주님을 그리워하며 환난 많은 이 세상에서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고통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은 그리움과 기다림의 감정을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라는 표현도 했다. 그리움과 기다림은 어느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들고, 어느 한 시간을  다른 시간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이어서 인생의 여정에서 삐걱대기 시작한 걸음에 기름칠을 하는 것과 같다.  프랑스의 소설가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에도 보면 이런 글귀가 나온다.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 질거야.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행복해 질거야…” 아이 밴 어머니가 태어날 자식의 출생을 기다림과 같이 기다림은 출생 때부터 인생에서 떼어 놓을 수 없고 기다림이 없다면 희망도 없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이 오히려 지루할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그리워하며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고 살았다. 로마 제국 폭군들의 혹독한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그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그리워하며 기다렸다. 이러한 재림신앙은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굳건한 믿음과 소망으로 일어서게 하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삿말은 “마라나타”(Maranatha)였다. “마라나타”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Lord Jesus, Come)이었다(계 22:20). 환난과 핍박 중에도 그들은 악수를 하면서, 포옹을 하면서 “마라나타”를 속삭이고 외쳤다. “마라나타”는 오실 주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신앙이 함축된 초대교회 성도들의 표어였던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이 사라져 가는 세속시대(Secular Age)에 살고 있다. 사도 바울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영원한 천국본향을 사모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신앙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영원한 본향이 없는 자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날마다 그리워하며 그가 주실 영원한 본향의 기업을 기다리는 행복한 신자들이 되어야 한다. Maranatha!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찬송 43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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