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예배의 설교에 대한 현대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설교를 듣고 접하게 된다. 기독교서점에 가면 얼마든지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집을 사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방송을 틀면 언제나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다. 더구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으로 언제 어디서나 목사님들의 설교를 검색하여 들을 수 있다. 참으로 편리한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넘쳐나는 설교들 중에 참된 설교보다는 듣는 시간이 아까운 설교도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설교를 듣는 청중도 설교를 듣고자 하는 열망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설교를 분별하고, 어떤 마음으로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
1800년대 네덜란드의 신학을 주도했던 칼빈주의자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와 예배하는 글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원래 이 글은 바빙크가 “De predikdienst”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그리고 후에는 Kennis en Leven(지식과 삶)에 포함된 글이다. 우리 말로는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이라는 제목으로 도서출판 다함에서 출판된 책 137-154쪽에 수록되어 있다.
I. 교회 예배의 설교에 대한 현대의 문제점
헤르만 바빙크는 “교회 예배의 설교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강력한 강단의 시대는 이미 죽고 없습니다”라고 했다(헤르만 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39). 이 한 구절에서 우리는 헤르만 바빙크가 살던 네덜란드 교회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이런 현상은 점점 더 가중되고 있다. 바빙크가 살던 시대보다 현시대는 더욱더 그렇다. 코로나19로 전 세계는 잔뜩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교회의 대면예배를 막았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명령을 내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방역을 위한다는 이유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예배도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배의 설교에서조차 복음이 빠졌다면 얼마나 암울한가?
오늘날에는 점차 교회에 대한 회중의 관심이 멀어져가고 설교를 듣고자 하는 열망도 감소하고 있다. 더 재밌는 것, 더 웃기고, 더 감동적인 것을 찾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딱딱하다거나 재미없다거나 하는 평가를 하면서 설교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오늘날만의 현상은 아니다. 바빙크가 살던 시대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다시 교회를 방문하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증가했다고 언급하고 있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39).
고재수 교수는 “교회가 있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되어져야 합니다.”라고 했다(고재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서울: CLC, 1987), 서문). 하나님의 말씀은 중생을 일으키는 수단이다. 그 복음은 현재까지도 전파되고 있다. 교회가 존재하는 한 설교를 계속된다. 그런데 그 설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만 설교되어야 한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이 빠지고 세상의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 윤리 도덕적 이야기만 전해지면 회중은 교회를 떠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현대는 감성주의가 시대를 이끌고 있다. 감성주의에 사람들은 쉽게 이끌린다. 그래서 교회도 설교도 감성주의가 이끌고자 한다. 설교에 감성적 내용이 없으면 거부한다. 설교에 울고 웃기는 내용이 없으면 재미없는 설교, 은혜(?)없는 설교라고 한다. 과연 울고 웃기는 것이 은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을 추구하고 이런 설교를 듣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들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또한 오늘날 회중은 하루 종일 교회에 앉아 있는 것을 거부한다. 온 교인들이 함께 모여 한 주 동안에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인도하심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빨리 끝내고 집에 가거나 야외로 나가려 한다. 주일성수에 대한 개념이 왜곡된 것이다. 그래서 주일 예배를 1부-4부, 많게는 6부-7부로 나누어 그 가운데 한 시간만 갔다 오면 주일성수를 다 한 것으로 이해한다. 일주일에 한 번만 교회에 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왜 아까운 시간을 교회에 가서 두 시간 이상씩 앉아 낭비하고 있는가? 이것이 현대 세대들의 사고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시대는 속도가 우선시된다. 그래서 인터넷도 속도, 스마트폰도 속도, 자동차도 속도, 컴퓨터도 속도를 우선시한다. 빠른 속도를 선호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앉아 있는 시간을 낭비라 여기고 아까워한다. 어떤 이들은 그 시간에 오히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보내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바빙크는 “교회에 대한 이런 반감은 상당 부분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과 관련하여 분명히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 영향 아래 ‘교회에 간다’는 말에 대한 개념이 전적으로 잘못 형성되어 있습니다.”라고 지적했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0).
오늘날 현대화는 바로 이런 설교와 예배에 대한 생각들을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현대화는 가장 빨라야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교회도 역시 말씀 아래 침묵하고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교회에 가는가? 교회를 구경하고 예배를 구경하기 위해 교회에 가는 것인가?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인가?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할 것이다.
II. 공적 예배에 대한 올바른 개념
현대화는 공적 예배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잃어버리도록 만들었다. 즉 “교회의 예배에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할 일이 상당히 많다는 생각, 수동적이지 않으며 도리어 분주하고 활동적이라는 생각, 우리 아버지의 사역에 동참하고, 주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드리기 위해, 즉 우리 자신이 세워지고 신앙 안에서 자리를 잡는 것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가장 거룩한 신앙 안에서 참되게 구비되고 세워지기 위해 우리가 거기서 제사장적인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종의 오해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3).
교회는 주님의 말씀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마 21:13; 막 11:17; 눅 19:46). 그런데 그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오해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제사장들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강조한 만인 제사장론이 그것이다. 만인제사장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누구나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구든지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기도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제나 다른 제사장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얼마든지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제사장의 사역은 더 이상 옛 언약 아래에서 중보자적인 사역에 있지 않다. 당시에는 특별히 제사장권에 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전에서 예배를 관장하는 것, 희생 제사, 천상의 영적 제사 즉 새 언약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제사가 그것이다. 이러한 제사는 하나님을 경배할 때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 예물을 드리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므로 이루어진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3).
바빙크는 이것을 둘로 제시한다. 첫째는 공적인 부르심, 둘째는 공동체적 부르심으로 본다. 공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의 가치와 일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실 때 온 세상이 그것을 듣는 것이 합당하다. 다음으로 공동체적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 된 신자들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참 이스라엘로부터 분리했던 것 같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그 몸 밖에 있는 개인과의 교제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4).
교회의 예배는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를 빼고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상할 수 없다. 즉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런데 그 예배에서 그리스도를 빼고 생각한다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다.
교회의 모임은 안식일에 열린다. 각 개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구약의 제사를 보면 제사장들이 있고, 백성이 제물을 가지고 성소로 찾아온다. 하나님께 나와 예배(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백성은 모여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탄원과 기도를 드린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린다. 찬송을 부르고, 헌금을 드리고, 기도를 드린다. 이것이 본질이고 영광스러운 일이고 주일마다 경험하게 되는 기쁨이다. 이렇게 우리는 천상의 회집 공동체의 일원으로 구성되어 함께 그 한 가지 일에 동참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천사들은 이 연합의 표로 우리의 모임과 천상의 모임에 모두 존재한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4).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21장에서는 “종교적 예배는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께 드려야 하며, 그에게만 드려야 하고, 천사들이나 성도들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예배해서는 안된다. 또 타락 이후에는 중보가 없지 않으나 다른 어떤 이의 중보를 통해서는 예배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예배한다”고 했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21장. 2)
기독교의 예배는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빠진 예배는 기독교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나 다른 존재에게 드리는 것은 기독교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 예배는 습관적으로 참여해서는 안 되는 고귀한 예식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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