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남긴 10가지 교훈
뉴스위크는 그를 ’21세기의 C.S. 루이스’라고 불렀다. 팀 켈러(1950~2023)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역할과 소명에 충실했으나 일반적으로 루이스의 역할과 동일하게 보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그는 영적 상담가이자 지성인이었다. 그는 세속주의자와 기독교인 모두가 존경하는 분명한 변증 논리를 펼친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영향력 있는 목회자이자 리더로 우뚝 서게 했을까? 크리스천헤드라인뉴스 G. 코너 솔터 SEO 에디터는 다음과 같이 조명했다.
▲팀 켈러 생애 중 중요한 사건들
팀 켈러는 1950년 9월 23일 펜실베이니아주 앨런타운에서 태어났다.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그는 종교 교육을 받았고, 그와 그의 가족은 모두 루터교 교인이었다. 하지만 켈러는 Uncommon Ground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자신의 성장 배경을 주류 기독교로 설명하며 종종 혼란스러워했다.
버크넬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켈러는 1970년 인터바시티 펠로우십을 알게 되었고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 신학 학위를 마친 후에도 인터바시티 펠로우십을 이끌며 계속 참여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는 실제적인 목회와 교육 경력을 쌓아갔다. 버지니아주의 웨스트 호프웰 장로교회에서 9년 동안 목회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5년 동안 가르쳤다.
1989년 뉴욕 맨하튼 지역에 교회를 개척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면서 그의 사역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그의 저서 ‘The Reason for God’에서 “그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바보 같은 짓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교회는 온건하거나 보수적인 뜻을 의미했지만 도시는 진보적이고 날카로움을 의미했다. 교회는 가족을 의미했지만, 뉴욕은 젊은 독신자와 ‘비전통적’ 가정으로 가득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믿음을 의미했지만 맨하튼은 회의론자, 비평가, 냉소주의자들의 땅이었다.
켈러의 교회 개척은 성공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2017년까지 리디머장로교회를 이끌었다. 그는 수천 명이 출석하는 예배에서 설교를 전했다.
켈러는 도시에 있는 많은 출석자들이 기독교 가정 출신이 아니며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특별한 접근 방식을 강구했다. 그는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다른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다가가는 대신 회의론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변증서들은 독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기독교가 그들이 찾던 해답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게 했다.
켈러의 접근 방식은 불신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재고하도록 유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일하는 곳, 상황에 맞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 자비 사역과 기독교 사상을 전달하는 방법을 고려할 것을 권장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자신의 교회에 적용하기도 했지만, 다른 교회 리더들도 도시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효과적인 사역을 개발할 수 있는 교회 네트워크로 이어졌다.
리디머장로교회에서 은퇴할 당시, 켈러는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저술하고 무신론자들과 논쟁을 벌였으며 복음주의 기독교인도 지성인이며 도시를 잘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핵심인물로 꼽혔다.
켈러는 2020년에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암으로 인해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으로부터 자유하며 느리지만 다양한 장소에서 연설을 계속 이어갔다.
그는 2023년 5월 19일,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시간에 감사드리며, 이제 예수님을 뵐 준비가 되었습니다. 빨리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저를 집으로 보내주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소천했다.
▲팀 켈러가 기독교인에게 주는 10가지 교훈
1. 기독교는 그 자체로 반문화적이다.
켈러는 그의 저서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많은 학생들이 다양한 이유로 파업이나 시위를 벌이던 1970년대 버크넬대학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파업 기간 동안 ‘격분한’ 켈러의 인터바시티 스터디 그룹은 자체 간판을 내걸었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뢰할 수 있는 실제 사건이다’였다.
2. 기독교인도 지성인이 될 수 있다.
마크 놀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반복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즉 딥러닝을 불필요한 것으로, 신앙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문제에 직면한다고 보았다. 켈러는 지성과 신앙이 함께 작용할 수 없다는 믿음을 거부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을 보여줬다.
3. 훌륭한 사상가는 자신이 받은 영향을 인정한다.
켈러의 도시 사역과 논쟁은 그를 독특한 연사로 만들었지만, 그는 루이스, 프란시스 쉐퍼,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고 그의 신학교 교수인 에드먼드 프로스퍼 클로니와 같은 사상가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자유롭게 인정했다.
4. 좋은 배필을 만나면 세계관이 넓어지고 하는 일이 풍성해진다.
팀 캘러를 언급할 때 그의 아내인 캐시 켈러에 대한 언급은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가까이에서 남편 팀 켈러의 저술에 대한 피드백 주었고 남편에게 C.S. 루이스의 책을 소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5. 사소한 것도 사람들을 건강하게 인도할 수 있다.
도시 사역으로 유명한 켈러도 초기에는 버지니아주 호프웰에 있는 작은 마을 교회에서 9년간 목회했다. 그는 후반기에는 거의 모든 일을 직접 해야 했고, 교인들을 가까이서 개인적으로 알아가면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었으며, 이는 나중에 더 큰 맥락에서의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6. 다른 문화권으로부터의 배움을 두려워하지 말라.
켈러는 영국 문화권을 여러 번 방문하고 그의 저서에 영국 기독교인을 인용하는 등 영국 문화에 호감을 보였다. 그는 교단의 뿌리를 탐구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학교 시절에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독교 서적 중 상당수가 영국 작가들의 작품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친밀감의 이유로 꼽았다.
7. 다양한 변증 방법을 함께 사용할 수 있다.
리 스트로벨과 같은 변증가는 역사적 증거에 근거한 논증을 사용하는 반면, 코넬리우스 반 틸과 같은 변증가는 전제에 대한 논증을 사용하는 등 많은 변증가가 한 가지 접근 방식에 특화되어 있다. 켈러는 각 접근 방식이 고유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한 가지 접근 방식이 다른 접근 방식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보다는 두 가지 접근 방식을 서로 다른 책에서 모두 사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8.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문화의 중심지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 기네스는 1994년 많은 기독교인들이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대신 문화 중심지로 옮겨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 영향력에 한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켈러는 리디머장로교회에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도시는 근본적으로 신자들에게 적대적이라고 주장하던 시기에 도시로 찾아가는 사역을 실천했다.
9. 효과적인 변증은 상아탑을 뛰어넘어야 한다.
켈러 방식의 핵심 특징은 독서를 많이 하면서도 자신의 아이디어가 중요한 실질적인 이유를 항상 보여줄 방법을 찾았다는 점이다. 그는 청중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항상 그들의 필요에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10. 죽음조차 교훈을 남기다.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인 지난 1월, 켈러는 프리미어 언빌리버블 팟캐스트에서, 임박한 죽음을 마주한 후 자신의 앞날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아내와 저는 암에 걸리기 전의 기도 생활과 영적 생활로 돌아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영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