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이 무너지지, 안으려면 그동안 소중하게 지켜온 신학적, 교리적, 신앙적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
제네바에 있던 칼빈은 그의 조국 프랑스에 깊은 관심을 두고 동역자를 보내어 개혁신학 운동을 후원하였다. 점차 프랑스 안에서도 칼빈의 개혁신학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프랑스에 파견한 칼빈의 제자들이 100여 명이 넘었다. 1555년부터 1572년까지 최소한 120 이상의 선교사를 프랑스에 파송하였다. 칼빈의 이러한 후원 아래 프랑스 개혁교회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프랑스 개혁교회는「신앙고백서」 40개 조항으로 대부분 칼빈의 사상에 기초했다. 그리고 칼빈의「기독교강요」와 제네바 교회와 스트라스부르 교회의 권징 규범을 따라 작성하여 프랑스 개혁교회를 운영하는 규범으로 삼았다.
신앙고백에서는“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하여 세워졌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사 없이 존재할 수 없다.”(제25조),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했다(제27조).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대로 성례가 시행되지 않은 곳에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참 교회의 흔적이 로마가톨릭교회 안에 남아 있다고 하여도 교황청은 정죄의 대상이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세례받은 바가 개종해 올 때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다.”라고 했다(제28조).
권징과 교회정치 원리에 대해서는“우리는 참된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권징에 따라 통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교회에는 목사와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어야 하고, 참된 교리가 유지되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혀야 한다.….”(제29조). “참된 목사들은 지위를 막론하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요, 주권자인, 보편적인 교회의 감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동일한 권위와 동등한 권세를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 간에 특별한 권세나 지배권은 행사할 수 없다.”(제30조).
그러나 프랑스 개혁교회는 1633년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외적인 박해보다는 내적인 부패 탓이었다. 지도자들 일부가 합리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교회의 힘이 약화하기 시작하였다.
1661년 루이 14세는 절대 군주제를 추구하면서 프랑스 안에 종교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 개혁교회의 신자들을 고사 적전에 들어갔으며, 다양한 박해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개혁교회는 파괴되고 학교는 폐쇄되었다. 그의 자녀들은 강제로 로마가톨릭교회 교인으로 자라게 했다.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은 가혹한 형벌로 다스렸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이민의 길을 택하였다. 피난 중에 붙잡힌 자들은 남자는 노예로 팔려 갔으며, 여자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1686년부터는 조국을 등지고 이민을 강행하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사형에 처하였다.
이런 죽음의 상황에서도 무려 25만 명이 넘는 개혁교회 신자들은 스위스, 영국, 네덜란드, 독일, 아일랜드, 남아프리카와 미국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1715년 위그노(프랑스 개혁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마지막 토벌 작전을 벌였다.
19세기 중엽 프랑스 개혁교회는 제네바의 영향으로 부흥하였다. 제네바에서 훈련을 받은 목사와 전도자들이 프랑스에 돌아와 1829년 리용에 전도자를 위해 훈련 학교를 세워 전도와 부흥을 주도해 갔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자유주의자들과 대립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래서 개혁신학과 신앙의 명맥이 유지되면서 그 후손들이 숫자는 적지만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은 대단했다.
개혁신학을 모토로 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는 그동안 교리적인 신앙고백과 교회를 운영하는 자치 규범 위에 견고하게 세워졌다. 그러나 시대적인 인구 감소와 함께 신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00년 넘게 지켜온 교단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있다. 교단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그동안 소중하게 지켜온 신학적, 교리적, 신앙적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
교단의 신앙고백과 신조, 교회 헌법은 여전히 우리가 지키고 계승해야 하는 아름다운 유산이다. 우리는 과연 개혁신학과 신앙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실천적인 행위가 개혁신앙의 터 위에 세워져 있는가? 목회와 교단의 활동이 개혁신학과 신앙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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