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7, 2024

[최인근 목사 칼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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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근 목사(시애틀빌립보장로교회 담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유비가 제갈공명과 함께 천하를 통일해 나가고 있을 때, 뜻하지 않았던 한 지역에서 맹획이란 인물이 이끄는 한 지방이 유비를 대적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터졌다. 사안이 중대한 만큼 유비는 제갈에게 군사를 맡겨 직접 해결 하도록 파송을 종용하게 된다. 제갈에게 당할 수 없었던 맹획은 곧 생포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맹획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와 다시 그 지방을 총괄하고 다스려야만 하였고, 민심 이반을 막는 길 또한 그것밖에는 없는 것으로 판단한 제갈은 배신자 맹획이지만 달래서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난폭한 맹획이 쉽게 항복할 리 없었다. 유비를 배신하고 돌아선 죄를 생각하면 생포된 즉시 처단하여야 하겠지만 민심을 고려하여 제갈은 맹획을 다시 풀어 준다. 그러나 맹획은 군사를 재정비하여서 다시 제갈을 공격해 왔고 제갈을 당할 수 없었던 맹획은 또 다시 생포가 된다. 그러나 제갈은 맹획을 다시 풀어 준다. 부하들의 원성이 더없이 높아갔지만 제갈은 나름대로의 보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포하고 풀어주기를 무려 일곱 번이나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난폭하고 잔인하기 이를데 없던 맹획도 녹아지게 되었고 결국은 제갈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게 되어 제갈은 뜻하였던대로 그에게 다시 그 지방을 맡겨 충성하게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귀경하여 유비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게 된다. 이는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의 일부이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찾아 나와 이렇게 여쭈었다. “예수님, 만약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줄까요? 일곱 번까지 할까요?”라고 말이다. 그는 참으로 대단한 용서를 들고 자신 있게 예수님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황당하였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칭찬을 기대하고 자랑스럽게 예수님을 찾았던 베드로는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결핍이라 할 것이다. 말세가 될수록 이처럼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도 성경이 증거하고 있으니 이것이 이상하거나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민생활 현장에는 이와 같은 현상이 너무 심하게 대두 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몇 백만불의 현금을 집안 금고에 두고도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여 서로 권총으로 쏘아 죽인 끔찍한 사건이나 친구를 오해하여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들이 바로 이것을 극명하게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용서에서부터 시작된다. 남을 행복하게 만들게 되면 자신의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 인생들은 남의 행복을 싫어하고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기에 너그러운 마음이 사라지고 몸서리나도록 무서운 분노만 노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광활한 미국 땅에 살면서도 마음은 콩알만큼이나 작아져 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삶에 대한 회의가 아니 들수 가 없다. 피곤하고 힘겨운 이민생활에 지친 우리들의 삶의 현실을 외면할 수야 없지만 그래도 우리들이 절대적인 전능왕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이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져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차피 한번 살고 가는 인생인데 기왕이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그렇게 큰 자가 되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 번만 더 참아 보고 생각해 보면 해답은 바로 거기 가까운 곳에 있는데 우리들은 그렇게도 인내하지 못하여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갈공명은 배신자도 너그럽게 참아주고 용서해 주어 결국은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게 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우린들 왜 그렇게 못하겠는가? 바로 우리 자신을 수련하고 다스리지 못한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용서란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마도 용사일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우리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는 어딘가 모르게 다른 용사가 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그렇게 되는 그 첫 출발이 이처럼 형제를 용서하는데 있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에 대한 모범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 주셨는데, 자신을 3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또한 맹세하기까지 하고 떠나가 버렸던 베드로를 단 한 마디의 책망도 없이 용서해 주셨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랬더니 그 베드로는 그처럼 용서해 주신 주님을 위해 십자가에서 꺼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충성하게 되었다.

그렇다. 진정한 용서만큼 강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자녀문제, 부부문제, 인간관계를 통한 숱한 우리들의 문제도 이 용서 안에서 다 해결될 수 있다. 용서는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변화시키는 사랑을 잉태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용서가 결여된 가정일수록 숱한 문제가 더욱 크게 해산되기 마련이다. 이 싱그러운 여름에 시원한 가슴을 파고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반복할 수 있는 용서의 큰 가슴으로 사랑을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이 있는 삶은 그 자체가 바로 천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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