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이민 목회, 결단의 고국 목회, 그리고 헌신의 은퇴 후 사역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송용걸 목사를 취재했다. 집회 인도차 LA를 방문한 송용걸 목사의 목회자로 과거, 현재 그리고 살아가려는 미래를 정리해 보았다.
송용걸 목사는 황해도 피난민 출신이다. 6.25때 부친을 잃고 유복자 남동생을 품은 어머니와 3살 때 피난 나와 의지할 곳도 갈 곳도 없어 부산 해변가에 천막을 치고 살기도 했다.
신앙이 돈독하신 어머니와 온갖 고생을 이겼으며, 어머니의 신앙의 유산으로 연대 신학과에 입학했지만 신학을 연구하는 것보다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평안교회 김윤찬 목사님의 추천으로 총신대에 입학해서 총신대 1회 졸업생이 되었다.
1966년 서울 영등포에서 고 옥한흠 목사와 공동으로 협성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였고, 1977년 간호사였던 아내를 따라 도미, 나성 필라델피아 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하였다.
1980년엔 오렌지 카운티 얼바인에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를 했는데, 당시 그는 1,000쪽이 넘는 전화번호부를 넘기며 A부터 Z까지 한국인 이름과 비슷하다 싶으면 편지를 썼고 그중 14가구가 교회에 출석했고 교회는 성장했다.
7년뒤에 다시 시카고 헤브론 교회를 섬기게 되었고, 교회는 급성장하며 대지면적 1만 3,500평에 2,000명이 모이는 공동체로 우뚝섰다.
송목사는 30년후 시카고 최대 한인 교회가 된후 하나님께선 “웃음은 넘치지만 기도의 눈물이 다른 조국교회를 섬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셨다”면서 “교회가 거대해질수록 자칫 잘못하면 사유화 문제가 발생한다” 면서 2008년 서울 신천 교회에 부임 했다. 당시 안정된 미국 목회를 포기하고 새로운 목회지로 부임한 것은 모험이었다.
60대에 새로운 교회에 부임한 송목사는 뜨거운 사역을 시작했다. 송목사는 새벽기도부터 주일예배까지 모든 예배에서 설교를 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교회가 성장했다. 부임당시 1,200명이던 교회는 2,200명이 주님을 섬기는 건강한 공동체로 성장했다. 그리고 송목사는 한국사역 10년을 마치고 70세 은퇴했다.
은퇴 후 또 화제가 되는 사역을 시작했다. 부산에서 시작한 ‘가나안 성도’를 돌보는 사역이다. 이른바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떠도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교회, 헌금 전액을 모두 베푸는 그런 성경적 교회를 이루는 꿈이다.
2020년에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게되고 중환자실에서 몇달을 보내는 어려움을 겪게된다. 어느날 깨어났을때 처음 본 아내의 모습은 하얀 할머니였다. 자신도 모르는 시간에도 울며 기도하고 곁을 지켜 주었던 사모의 고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은퇴후의 날들을 되돌아보며 누구탓이냐를 해결해야함을 깨달았고 “내탓” 으로 돌리는 겸허한 마음을 갖게되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죄를 지고가신 십자가의 진정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님이 그리하셨기에,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다 예수님 처럼 보인다고 한다. 말로만 전하고 믿는다고 할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과 사역, 죽으심의 의미를 깨달아 실천할때 진정한 복음이 전파될 것임을 강조했다.
한편 송목사는 지난 9월 4일과 5일 나성열린문교회(박헌성 목사) 가을 부흥회를 인도했다. 여전한 열정으로 말씀을 증거했는데, 성도들의 삶에 직결된 주제들을 “돈”, “탓”, “빛”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해서 말씀을 전했다.
집회 중에 “난 목회하면서 더 바랄게 없다. 설교를 통해 감동받고, 그대로 살겠다고 하면 그게 내가 받은 댓가고 보상이다. 그래서 집회를 다닌다. 반드시 어디선가 터진다. 교인들이 은혜를 못 받으면 담임목사라도 은혜를 받고 눈물이 터진다.”라고 했다.
송목사는 남은 사역에 대한 포부도 밝혔다. 앞으로 진정한 복음전파를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전파를 위해, 한국과 미국 가나안 성도들을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치는 각오로 집회를 인도할 계획이라고 고백했다.
이애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