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21, 2024

[정준모 박사 칼럼] “11월에 신학적 상념(想念):어떻게 살 것인가?”  

인기 칼럼

정준모 박사

11월에 신학적 상념(想念):어떻게 살 것인가?

서론)

어수선한 세상, 요란한 지구촌, 아비규환의 모습들을 보면서 이른 새벽에 인생 문제를 상념 해 본다.

인간답게 살다가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삶의 바른 자세이고 해답이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휴머니즘을 슬로건이 아니라 성경적 원리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 행복의 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의 삶의 존재 목적이며 존재 양식이다. 휴머니스트를 주창하는 “행복”은 성경에서 추구하는 성경적 원리에서 살아갈 때, 나타나는 가치요, 현실이요, 상태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행복은 모순이요, 이상이요, 망상이요, 억지일 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원리를 떠나서 인간답게 살길이 없다.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적할 것처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스스로 행복의 웅덩이를 파는 인생, 생수의 근원, 행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들, 그것이 마치 인생답게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목적, 가치, 행복 등이 과연 그것이 실상인가? 허상인가? 그것이 진정 나의 삶의 목적이 되며 인간답게 바로 살고 있는 것인가?

존 파이퍼(John Piper)의 명저 ≪하나님을 사모함≫(Desiring God)에서 강조한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그리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인생의 존재 목적이며, 인간답게 사는 근본 원리요 방향임을 오늘도 끊이 없이 나의 삶에 적용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1. 자신의 존재 가치의 귀중성을 알고 살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유일한 피조물로 절대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영적 존재로써 동물이나 사물, 다른 어떤 피조물과 견줄 수 없는 존귀한 존재이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 그 영적 세계를 추구하고 갈망하는 피조세계에 있어서 남다른 특별한 존재이다. 영적 존재로서 물질을 인간은 누구나 인종종류, 빈부귀천, 교육유무, 미모조건 그 어떤 상태, 분류, 모습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고유의 가치가 있다.

인간 세계의 어떤 사회적, 국가적, 심지어 종교적 제도까지도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내 존재의 가치와 귀중성을 알아야 한다. 특별히, 시편 139편에 따르면,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1-6절), 어디나 모든 곳에 거하시는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7-12절), 나 자신을 너무나 놀랍게 창조하신 하나님(13-18절), 나 자신을 보살피시고 영원히 인도하시는 하나님(19-24절)을 극진히 찬양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존재는 신묘막측한 존재이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발람 돈 키(Balaam Don Key)이란 친구로부터 복음을 소개받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페이스북 설립자인 마크 저커버그(Mark Elliot Zuckerberg)는 한 인터뷰에서 “시편 139편 1~4절 말씀에서 페이스북 설립에 관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는 말하길 (시편 139편 1~4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을 읽을 때, 무언인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하늘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고 천사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천사들의 소리가 수십억 개의 서버소리와 같고 천상의 반짝거림이 백라이트 키보드처럼 보였다”고 고백했다.

그렇다. 저커버그만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유명하던 무명하던 해 아래 있는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이며, 특히 그리스도의 보혈로 중생한 재창조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특별 중 특별한 존재로 세움을 받은 존재임 바로 아는 길이 인간 바로 살아가는 길이다.

2. 자신의 가치, 사명, 은사, 능력을 발휘하며 살자.

휴매니스트들은 인간의 잠재력 계발에 극도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가령,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인간의 최고의 잠재력을 “성생활의 성취”로 보았다. 스키너(Burrhus Frederic Skinner)는 “사회적 조건의 성취”로 보았다, 매슬로(Abraham Harold Maslow)는 “인간성 초월로 신적 상태”로 보았다. 융(Carl Gustav Jung)은 “모든 인간의 집단 무의식”으로 보았다. 또한 뉴에이즈(NewAge) 추구자들은 “영으로 신으로 진화하는 무한한 잠재력” 등으로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소중한 인간,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은혜와 은사가 있다. 그것이 다섯 달란트, 세 달란트, 한 달란트가 될 수 있다. 그 주어진 시간이 길고 짧을 수 있다. 그 능력이 크게, 작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형상을 닮은 인간, 특히,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은총으로 새사람이 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은 은혜와 함께 은사를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성적, 정서적, 의지적 분별력, 계발력, 생산력, 적응력 등을 주셨다. 사탄의 정죄감, 심리적 압박감, 환경적 지배력 등에서 속박당하지 않는 존재로 우리를 아담의 후예로 창조하셨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해 주셨다. 이러한 인간 본연의 정체감,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기의식을 가지고 인생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살아야 가야 한다. 결코, 과거, 죄악, 사탄, 사람, 율법, 환경에 지배를 받거나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2-13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 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설파하였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의의 종노릇하며, 의의 무기로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3.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고귀한 존재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자녀 된 백성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참으로 생활의 규범이요, 원리인 십계명의 영성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것은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깨우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다. 사랑의 삶 그 자체가 바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오늘도 교계 신문을 보면서, 또 이것은 누구의 자태이며, 이 신문을 쓴 자는 누구 편에서 또 객관성을 읽고 정치적으로 편협하게, 이익의 목적을 두고 쓰는가 감지할 수 있었고, 또 누군가 언론의 희생양이 되는가 생각이 들었다. 그 사건에 등장하는 모든 자들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기본 의식, 본질 의식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실천적, 실재론적, 삶의 현장에서 무신론주의자 같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어찌 자기 손으로 하늘을 가리듯 행동할 수 있을까? 이웃을 사랑한다면 저렇게 처절하게 인격을 윤린 당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잠시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어설픈 판단이었고 미숙한 대처임을 깨닫게 될 것이고, 실존적 부끄러움을 당하는 인물들이 부상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이며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는 삶이다. 오늘날 가정 공동체, 교회 공동체, 직장 공동체, 국가 공동체에서 진실로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우리 모두가 자성해야 하겠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몇 해 전 대선 때 상황을 기억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제일주의, 백인우월주의 사랑도, 반트럼프 진영의 반트럼프 대적 슬로건과 외침도, 결국은 인간의 극한 개인주의적 치욕의 외침일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초민족적, 초국가적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너무 이상론적일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실천이 이 땅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지킬 수 없는 능력 밖의 실천과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단지, 하나님의 실천적 순종을 우리의 죄성이 가로막을 뿐이다.

4. 주님에 반드시 선다는 종말의식 속에서 살자.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섭리 주 하나님, 심판 주 하나님의 손아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인간답게 살라고 생명, 사랑, 은사, 능력, 시간, 환경, 사람, 가정, 직장, 국가, 교회 등등을 다 주셨다. 부족함이 없게 감당하도록 주셨다. 단지 인간의 죄성과 상황에 따라 인간답게 살았는지 못살았는지 결과는 다양하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대로 반드시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을 하신다. 알곡과 쭉정이, 앙과 염소를 구분할 때가 반드시 온다.

기독교 역사관은 시작과 종말의 사관이다. 시작이 있기에 종말이 있다. 나 자신의 시작이 있기에 나 자신의 종말이 있다. 역사의 시작이 있기에 역사의 종말도 반드시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은 곧 내가 종말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염세적 시간관이 철학사상이 아니다. 성경적 시간관과 역사관, 그리고 인생을 바로 직시하고 거기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오늘 아침 로마서 6장을 묵상하면서 이런 의미 있는 글귀를 읽었다,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 1780-1847) “다가올 영생에 대한 총체적 준비는 성경이 우리에게 전한 말씀으로 바로 믿고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을 바로 행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어제는 아내와 이야기하면서, 이제 남은 날이 살아온 날에 비하면 남은 날이 적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살 것을 준비하기 위해 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영원히 살 나라를 삽시간에 준비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가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간다, 이미 가게 되어있다, 구원의 확실성과 영원성을 믿고 가지고 산다.

그러나 신부가 신랑을 준비하지 않고 맞이할 수 없지 않는가? 부끄러운 마중이 아니겠는가? 인간답게 살다가 주님 앞에 서는 것이 인간의 기본 도리라고 생각한다. 장사하다, 사업하다, 죄짓다. 마귀 종살이하다. 싸우다. 미워하다. 가짜 연극하다. 거짓말하다. 주님 앞에 설 수 없지 않는가?

충성된 종으로 살다가 가야 하지 않겠는가? 거룩한 의의 세마포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다 지킬 순 없겠지만 하나님 말씀 성경 66권은 제대로 알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만큼 말씀하셨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영혼을 구령하는 일,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일, 가정 복음화,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를 위해 진정한 나의 눈물, 나의 땀, 나의 흔적이 있는가? 무엇보다도 거룩, 거룩을 위한 나의 회개의 삶이 있는가?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며, 말씀에 의한 말씀의 실천적 순종의 현장이 있는가를 날마다 깊이 묵상하고 점검하고 회개하고 실천해야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요즈음 절실히 하나님께서 깨우치시는 은혜는 “무엇을 이루려기 보다, 거룩의 사람이 되라”, “보이는 것에 감동을 받고 감동을 주기보다 내면 세계, 영혼 세계, 천국을 앙망하라”이다.

결론)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우수수 떨어진 낙엽, 바람에 뒹구는 낙엽, 가지런히 아스펜 둥지에 달려 팔랑거리는 나뭇잎을 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인간답게 사는 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일생이다. 인간답게 산다는 명제를 모르는 게 불행한 인생이다. 그러나 알고도 살지 못하는 자신들에게는 깨우침과 실천이 요청된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본연의 모습이다. 그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복된 존재로서 인식이 중요하다. 인간답게 살라고 주어진 시간, 능력, 재능,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인간답게 사는 길을 걷은 것이다. 무엇보다. 개인의 종말, 우주의 종말을 향해 살아가는 자로서 그분 앞에 서는 날, 그때를 준비하면 살아야 한다. 임박한 종말을 맞고, 당황스런 종말을 맞이하지 않고 날마다 종말의 시간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야 하겠다. 그날이 반드시 임하고 있다. 회개와 거룩의 삶으로 날마다를 수놓아야 하겠다. 지난번 쓴 원고를 자신의 삶에 다시 투영하며 깊은 인생무상의 상념에 잠기며, 어떻게 남은 인생을 가치있게 살다가 주님 앞에 설 것인가를 통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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