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7편 1-16절 강해-
서론)
코로나, 고물가, 고환율, 저소득, 직원 감축, 우크라이나 전쟁, 이태원 참사, 여야 갈등, 각 개인의 삶의 형편 등 고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2022년 추수감사절이 다가온다. 욥과 하박국의 심정으로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이다. 그러나 의례적이고 의식적인 감사절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 습관적이고 연례 종교적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생활의 습관화는 영적 경직화의 위험이 있다. 감사절의 의미가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 갈수록 그 의미도 더욱 성숙해져야 한다.
2022년도 한 해 동안도, 지구촌 여러 곳에 온갖 재난과 사고, 전쟁과 질병, 폭동와 시위, 자연재해와 인재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그분의 뜻대로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 섭리 주, 심판 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피조물로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마땅한 자세이며 태도일 것이다.
시편 107편은 124편과 함께 공동체 감사이다. 개인적 감사 시는 시편 18편, 30편, 116편을 들 수 있다. 감사는 개인으로부터 공동체로 확산되고, 전개되고 흘러가야 한다. 마치 시냇물이 모여, 강물이 되고, 강물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듯이, 개인, 가정, 교회, 국가적 감사되어야 한다.
청교도 후예인 미국의 경우는 아직도 개인과 가정에서 감사가 교회 공동체와 국가 공동체적 감사로 연결되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본문 중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해야 하는 그 이유를 살펴보고, 또한 어떻게 감사해하는지 성경적 교훈을 얻고자 한다.
1.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감사하라(1-3절)
1절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성경에 “선하고 인자하심”이 성경에 상당수가 나온다. 그 대표 구절이 오늘 본문인 시편 107편 1절과 시편 26편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말씀이다.
선(善)은 히브리어로 “토브”로써, 창세기 1장에 “토브”라는 말이 “좋다”라는 말로 매일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하신 말씀이다. 창세기 1장 4, 12, 18, 21, 31절 등에 나온다. 이 단어 뜻은 하나님의 판단으로 보실 때, “좋다”는 그것이 바로 선이다. 하나님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좋다”고 보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긍휼, 자비, 은혜 모든 것을 내포하는 의미로 불 수 있다.
인자(仁慈)는 히브어로 “헷세드”, 헬라어로 “아가페”로써, “긍휼”, “사랑”, “자비” 등으로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속성을 의미한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폭넓은 의미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함께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또한 인간에게 베푸신 가장 크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다. 범죄한 인간, 하나님을 떠난 인생, 자행 자제하면 자기 고집대로 살았던 탕자같은 인생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있기에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여도 영접해 주시고 환영해 주신다. 또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에 우리가 염치 불구하고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시편 25: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여기서 시인이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난날 자신이 저질렀던 죄와 허물을 생각하면, 자신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지난날의 삶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인자하심을 따라 자신을 기억해 주시고, 주의 선하심을 따라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시편 103편 8-11절에 시인을 놀라운 감사를 드리고 있다. [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그렇다. 2022년 한 해도 주께서 베푸신 가장 큰 은혜는 우리의 행위와 모습대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맞아 주신 그 풍성하시고 놀라우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릴 수밖에 없다.
2022년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올해 한 해 동안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고, 깨닫고, 감사하고, 그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의미요 마땅한 태도이다. 다윗은 보잘것없는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회고하면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자신에 따랐다고 감격하고 감사하고 찬양하였다.
2. 건져주시고 인도하심을 감사하라(4-9절)
본문 4-9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자. [4]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본문 기자는 역사적 상황을 회고하면서 여호와께 공동체적 감사를 드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 사건, 40년 광야 생활, 가나안 정복 등의 역사적 사건을 회상하며 감사드리고 있다.
430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의 극적 사건으로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는데 출애굽 기적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불행스럽게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 길에서 모질게, 혹독하게 훈련을 받았다. 그 이유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정탐꾼들의 보고에 대한 불신, 불평, 불만, 불순종으로 기인되었다(민 14:33-34).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40년간의 광야 길은 고달픈 길이었다. 그들은 거할 성 없었다. 황량한 사막이 그들의 거주지였다. 물도 식량도 충분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구름기둥 불기둥의 은총,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 반석에서 생수의 은혜를 맛보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본 시편에는 “근심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이 4번 나온다(6, 13, 19, 28절). 연약한 인간들은 고통 전에는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지 않는다. 고난을 당하면,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 그래서 “고난이 내게 유익하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시119: 71)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율례, 진리를 배우게 된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군요”, 고난 속에서 “하나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죽어 마땅할 죄인입니다. “주여, 용서하소서”라고 깨닫고 부르짖게 된다.
9절 “이는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모습이시다.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며 사모하며 간절히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며 그들의 영혼을 만족시키신다.
3. 구원하시고 베푸신 기적을 감사하라(10-16절)
본문 10절에서 16절을 살펴보자,[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맨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6]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중요한 인생의 질문과 해답이 있다. 왜, 선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흑암, 사망의 그늘에 아래 두실까?, 왜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하실까? 고난에 대한 질문이다. 성경, 신학, 철학, 종교에서 숱하게 던지는 질문이다. 왜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실까? 라는 질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박윤선, 김준곤, 옥한흠 목사님도 이 문제에 대하여 자신들이 설교를 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도 실존적 아픔이 존재하였고, 그것을 극복하시느라고 힘드셨다.
해답은 성경에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에 오는 채찍으로서 고난이다. 또한 마음 낮추시기 위해 오는 연단의 고난이다. 그 고난 속에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게 되는 신앙에로의 회복이니 감사하게 된다. 고통에서 구원, 흑암과 사망의 그들에서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니 감사하게 된다. 얽은 줄을 끊으시고, 놋문을 깨뜨리시고, 쇠빗 장을 겪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니 감사하게 된다.
평생 질고로 살았던 일본의 기독교 여류작가인 삼포능자(미우라 아야코)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체험한 시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주님이 있습니다.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 조차 없습니다.“
결론을 맺는다. 어렵고 힘든 시대적, 삶의 정황 속에서 추수감사절을 맞는다. 주님이 나의 감사 이유가 되자. 주님이 나의 감사의 원천이 될 때, 우리도 역경 속에서도 하박국의 기도, 욥의 신앙고백, 삼포능자의 감사의 시가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