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21, 2024

[정준모 박사 칼럼] 자연세계에서 깨우침을 받는 인간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

인기 칼럼

정준모 박사

자연세계에서 깨우침을 받는 인간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

콜로라도 고산지 야생화

●시카코 보타닉의 분재와 콜로라도 고산지의 야생화의 생명력이 준 교훈들

지난 6월에 며느리 대학원 졸업식 참석차 시카고를 방문한 적이 있다. 졸업식을 마친 후 양가의 가족들과 시카고의 명소 중 한 곳인 보타닉 가든(Chicago Botanic Garden)을 관람한 적이 있다.

1972년 개관한 보타닉 가든은 시카고 북부 서버브 부촌인 글렌코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국 박물관 협회가 인정하는 17개 공원 중의 하나이며, 385에이커의 땅에는 9개의 섬이 81에이커의 호수에 둘러싸여 있다.

보타닉 가든에는 230만 개의 다양한 식물이 보전되어 있다. 이를 심고 가꾸는 데에 무려 1,0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있다고 한다. 24개의 테마 정원과 여러 개의 정자, 과수원, 산책로, 6개의 대초원, 자연 그대로의 숲, 개울, 연못, 계곡, 언덕과 구릉, 그린 하우스, 갤러리, 도서관, 식물보존 과학센터 등도 있다. 2021년 한 해 동안 방문객만 1,139,448명이라고 하니 과히 그 명성이 대단한 것 같다.

그렇게 잘 가꾸어진 화단의 각종 꽃들, 잘 심겨진 크고 작은 희귀한 나무들, 아름답게 펼쳐진 호수 등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특별히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을 곳이 있다. 그곳은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아니라 분재가 전시된 곳이었다.

필자 정준모 목사_700년-1000년 분재

위 사진의 분재는 약 700년-1000년 된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생존해 왔을까? 의아하고 신기했다. 그것은 아마 그 분재를 대를 이어 키워온 누군가의 인력의 수고와 노력이 따랐을 것이고, 또한 그 분재에 심겨진 나무의 생존력과 생명력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요즈음 나는 콜로라도 로키산맥의 높고 깊은 인적이 끊어진 지역에 만개된 야생화를 보면서, 정원에 정원사에 의해 인위적으로 피워진 아름다운 꽃과는 사뭇 달리 보이는 것들이 수없이 많다. 이리저리 무질서하게 위치도,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의 모습도 엉성해 보이기도 하고, 이런 색깔 저런 색깔의 잘 어울리지 않는 나열 속에서도 또 다른 질서와 나열과 모습을 보게 된다.

특별히 긴 겨울의 눈 폭풍에 뿌리가 뽑히고, 뜨거운 햇빛에 가뭄에 견디고, 모순 기후의 천둥과 폭우 속에서 견디고 살아남아 창조주께 존재의 가치를 인내로 자태를 드러내는 로키 고산 지대의 야생화들이 신기하고 존귀한 생각이 든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투 속에 생명력을 지키려는 인내심과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다하려 애쓰는 피조물의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연 세계에서 투영된 인간답게 산다는 성경적 명제를 깊이 묵상해 본다

인간답게 살다가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삶의 바른 자세이고 해답이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휴머니즘을 슬로건이 아니라 성경적 원리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 행복의 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의 삶의 존재 목적이며 존재 양식이다.

휴머니스트를 주창하는 “행복”은 성경에서 추구하는 성경적 원리에서 살아갈 때, 나타나는 가치요, 현실이요, 상태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행복은 모순이요, 이상이요, 망상이요, 억지일 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원리를 떠나서 인간답게 살길이 없다.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적할 것처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스스로 행복의 웅덩이를 파는 인생, 생수의 근원, 행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들, 그것이 마치 인생답게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목적, 가치, 행복 등이 과연 그것이 실상인가? 허상인가? 그것이 진정 나의 삶의 목적이 되며 인간답게 바로 살고 있는 것인가?

존 파이퍼(John Piper)의 명저 ≪하나님을 사모함≫(Desiring God)에서 강조한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그리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인생의 존재 목적이며, 인간답게 사는 근본원리요 방향임을 오늘도 끊임없이 나의 삶에 적용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자신의 존재 가치의 귀중성을 알고 살아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유일한 피조물로 절대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동물이나 사물, 다른 어떤 피조물과 견줄 수 없는 존귀한 존재이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로써 그 영적 세계를 추구하고 갈망하는 피조 세계에 있어서 남다른 특별한 존재이다. 영적 존재로서 물질을 인간은 누구나 인종 종류, 빈부귀천, 교육유무, 미모 조건 그 어떤 상태, 분류, 모습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고유의 가치가 있다.

인간 세계의 어떤 사회적, 국가적, 심지어 종교적 제도까지도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내 존재의 가치와 귀중성을 알아야 한다.

특별히, 시편 139편에 따르면,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1-6절), 어디나 모든 곳에 거하시는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7-12절), 나 자신을 너무나 놀랍게 창조하신 하나님(13-18절), 나 자신을 보살피시고 영원히 인도하시는 하나님(19-24절)을 극진히 찬양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존재는 신묘막측한 존재이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발람 돈 키(Balaam Don Key)이란 친구로부터 복음을 소개받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페이스북 설립자인 마크 저커버그(Mark Elliot Zuckerberg)는 한 인터뷰에서 “시편 139편 1~4절 말씀에서 페이스북 설립에 관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는 시편 139편 1~4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을 읽을 때, 무언인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하늘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고 천사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천사들의 소리가 수십억 개의 서버소리와 같고 천상의 반짝거림이 백라이트 키보드처럼 보였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사실과 이야기는 저커버그만이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유명하던 무명하던 해 아래 있는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이며, 특히 그리스도의 보혈로 중생한 재창조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특별 중 특별한 존재로 세움을 받은 존재임 바로 아는 길이 인간 바로 살아가는 길이다.

●자신의 가치, 사명, 은사, 능력을 발휘하고 살아야 한다

프랑스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는 늘 서있는 사람을 조각하곤 했다. 그 이유는 “수평의 인간은 잠이요, 의지의 상실이요, 인간다움의 포기요, 굴복이요, 백치를 가르킨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빈약한 체구를 가졌더라도 서 있을 수 있는 한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서 있는 사람, 곧 수직성의 인간상에 대한 나의 철학이고 미학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누워있고, 자고, 게으른 존재가 아니다. 서서 활동하고, 서서 창조주의 창조의 원리와 부름에 응답하는 자이다.

휴매니스트들은 인간의 잠재력 계발에 극도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가령,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인간의 최고의 잠재력을 “성생활의 성취”로 보았다. 스키너(Burrhus Frederic Skinner)는 “사회적 조건의 성취”로 보았다, 매슬로(Abraham Harold Maslow)는 “인간성 초월로 신적 상태”로 보았다. 융(Carl Gustav Jung)은 “모든 인간의 집단 무의식”으로 보았다. 또한 뉴에이즈(NewAge) 추구자들은 “영으로 신으로 진화하는 무한한 잠재력” 등으로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소중한 인간,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은혜와 은사가 있다. 그것이 다섯 달란트, 세 달란트, 한 달란트가 될 수 있다. 그 주어진 시간이 길고 짧을 수 있다. 그 능력이 크게, 작게 나타날 수 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형상을 닮은 인간,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으로 새사람이 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은 은혜와 함께 은사를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성적, 정서적, 의지적 분별력, 계발력, 생산력, 적응력 등을 주셨다. 사탄의 정죄감, 심리적 압박감, 환경적 지배력 등에서 속박당하지 않는 존재로 우리를 아담의 후예로 창조하셨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해 주셨다. 이러한 인간 본연의 정체감,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기의식을 가지고 인생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살아야 가야 한다. 결코, 과거, 죄악, 사탄, 사람, 율법, 환경에 지배를 받거나 종속되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2-13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설파하였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의의 종노릇하며, 의의 무기로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고귀한 존재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자녀된 백성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참으로 생활의 규범이요, 원리인 십계명의 영성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것은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깨우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다. 사랑의 삶 그 자체가 바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사랑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의 강령(綱領)은 “일의 으뜸이 되는 큰 줄기”이란 뜻이다. 영어 번역본에는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hang”(KJV), depend(NASB, RSV), based on (NLT)이다. 개혁개정에 강령이라고 소개된 이 단어가 바른 성경에는 “달려있다” 현대인, 우리말 성경에는 “나온 것이다”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구약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 성경의 중심이 바로 “사랑”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의 어떤 계명이든지 그 계명의 기본 정신과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켜야 할 명령이 바로 사랑이다.

사실 오늘날 가정, 사회, 국가,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한다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밖에 없다. 그 사랑은 조건적이고, 제한적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이다. 그 무조적적이고 무제한적 사랑은 바로 십자가가 사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같은 죄인들에게 한량없이 베푸신 사랑, 아가페 사랑이다.

디엘 무디

헨리 크로웰(Henry Parsons Crowell)은 미국에서 가장 큰 오트밀 회사 ‘퀘이커 오츠’(The Quaker Oats Company)의 설립자이다. 그는 9살 때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그 역시 폐결핵에 걸려 절망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당시 미국의 대부흥의 주역이었던 무디의 집회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다. 그 때 무디가 “오직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 하나님께 쓰임 받는 위대한 생애를 살라”는 설교를 듣고 하나님 앞에 서원했다.

“주님, 저는 무디 선생님처럼 말씀을 전할 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돈을 벌 기회를 주신다면 무디와 같은 전도자에게 복음 전도를 위한 후원자가 되겠습니다. 저로 하여금 돈을 벌게 해주시고 하나님 사역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제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위해 저의 삶을 바치겠습니다.”

그는 당시 남북전쟁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새벽부터 나가 일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저렴한 가격에 우유만 부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오트밀 시리얼”을 개발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시리얼 사업은 크게 성공을 하게 되어 큰 거부가 되었다.

크로웰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그리스도의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 빈민계층을 위한 각종 사회 봉사와 구제 사업에 힘을 쏟았다. 그는 늘 “하나님께서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을 기뻐하실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내가 참으로 이웃사랑을 위해 진정으로 헌신하고 있을까?” 노심초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평생을 살았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당시 최고의 복음적 신학교인 무디 성경학교 호튼 교장이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한 추도사를 낭독했다.

“헨리 크로웰은 제가 만나본 사람 중에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한 모든 일에서 자신은 숨기고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는 세상 박수갈채를 원하셨던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잘했다는 인정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크로웰에게 당신의 그 아름답고 훌륭한 모습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겸손하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예수’라고 말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언젠가 반드시 주님에 서게 된다는 종말의식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섭리 주 하나님, 심판 주 하나님의 손아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인간답게 살라고 생명, 사랑, 은사, 능력, 시간, 환경, 사람, 가정, 직장, 국가, 교회 등등을 다 주셨다. 부족함이 없게 감당하도록 주셨다. 단지 인간의 죄성과 상황에 따라 인간답게 살았는지 못살았는지 결과는 다양하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대로 반드시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을 하신다. 알곡과 쭉정이, 앙과 염소를 구분할 때가 반드시 온다.

기독교 역사관은 시작과 종말의 사관이다. 시작이 있기에 종말이 있다. 나 자신의 시작이 있기에 나 자신의 종말이 있다. 역사의 시작이 있기에 역사의 종말도 반드시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은 곧 내가 종말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염세적 시간관이 철학사상이 아니다. 성경적 시간관과 역사관, 그리고 인생을 바로 직시하고 거기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주님, 나 개인과 이 우주의 종말로 향해 치닫고 있는 이때, 깨어 경성하고 주님이 주신 은사대로 인간답게, 진실한 그리스도인답게 날마다. 때마다, 시마다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사진출처: 필자 및 페이스북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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