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22, 2024

[정준모 박사 칼럼] “용서의 샘물이 이웃에게 넘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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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 박사
세도나 홀리 크로스 수도원

2022년 한해의 끝자락에서 묵상 중 떠오르는 몇 개의 키워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 회개, 용서, 겸손, 인내, 믿음 계승, 인류 평화, 어려운 이웃 등입니다. 그중에 <용서>에 집중하여 생각해 보고 글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용서>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입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한 용서는 인간의 본성으로 결코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일반적 정서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로키 마운틴 국립 공원 정상(12,000피트)위에서 가마득히 보이는 아래에 펼쳐지는 전경을 내려다보면서 생각을 해 봅니다. 저 까마득한 계곡, 그리고 저 깊은 계곡을 사이를 지나 몇 시간 동안 자동차로 올라온 수많은 고비 고비들, 눈 앞에 펼쳐진 산, 나무, 돌, 눈, 흙, 물 그리고 쓰러진 나무, 높이 솟은 나무, 풀, 야생 꽃, 벌, 새, 짐승, 푸른 하늘, 다양한 모양의 구름 이 모든 자연의 조화가 바로 변화무쌍한 인생의 마음의 모양이며 색깔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많은 학생들에게 소개하였던 상담심리학자인 데이빗 A. 씨멘즈(David A. Seamands) 쓴 《상한 감정의 치유, Healing for Damaged Emotions-두란노 출판사》라는 책에서 “우리 인생은 잘라놓은 나무 테”와 같다고 했습니다.

잘라놓은 나무 테는 그 나무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가물었을 때, 홍수가 났을 때, 불이 났을 때, 몹시 바람이 불었을 때 등등의 지난날 생존의 환경과 상황을 보여줍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할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오히려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살고 있습니다.

일평생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의 감정에 쇠 고랑을 스스로 차고 살아갑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의 용광로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스스로 과대망상의 미움의 불길, 감정의 불씨들을 더욱 모아 온 마음을 스스로 불태우고 타다 남은 잿더미 위에서 울부짖는 마음의 감옥생활을 하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 역시 데이빗 씨멘즈의 조명대로, “나는 지난 몇 년간 나의 인생의 나이테에는 용서하지 못한 울분, 원한, 복수심 등이 깊게 상처가 나 자신이 아닌가?” 스스로 자가 진단받을 수 있었습니다.

로키산 자락에는 틈틈이 죽어가는 나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우람하게 자라던 수많은 로키 산에 펼쳐진 나무들이 죽어가는 모습(우리나라의 소나무 에이즈와 같은 질병, 너무 산이 크고, 나무들이 많이 방제할 방법을 엄두도 못내고 있는 실정)을 보면,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마음 아픈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름답게 지어진 우리 인생의 마음들이 상하고 찢어지고 깨어지고 온갖 증세와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용서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자신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둘째로, 자신의 자존심 때문입니다. 셋째로, 자존감의 상실 때문입니다. 넷째로, 용서했다는 스스로 착각 때문입니다. 다섯째, 용서를 위한 고통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국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자기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분노와 미움의 굴속에 갇혀 나오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분노와 용서의 감옥에서 나오기를 갈망하는 영혼의 갈증이 바닥이 났기 때문입니다. 상대로부터 받은 상처를 자신의 마음의 영상을 되풀이하는 것은 마치 방울뱀 꼬리를 스스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상처를 받고 물리지 않기 위해서는 속히 방울뱀 꼬리를 놓아야 합니다.

높은 로키 산에 있는 나무를 짜르는 것과 묘목을 싶어 거목을 만드는 것과 어느 것이 쉬울까요? 용서하기가 용서받기보다 더 어려운 우리의 마음의 현상들을 봅니다.

필립 얀시, What’s So Amazing About Grace, <놀라운 은혜> 책에서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를 합니다. 저 친구가 무식해서 그런 거야, 그 사람의 행동에 문제가 있지 않아. 한동안 고생 실컷 하게 내 버려둬. 자기가 저지를 일에 고통을 당해 봐야 알 거야, 나는 절대로 잘못 없어, 절대 잘못은 저 친구야, 내가 먼저 나설 일은 아니지, 잘못한 줄도 모르는 그 친구를 내가 어떻게 용서해?”. 성경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직시하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14-15절에 보면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때때로 용서하는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부담되는 마음을 많이 느낄 때가 있어, 용서라는 주제를 회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용서하라고 설교하는 것은 또 다른 위선이고, 자신의 마음에 또 다른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용서를 체험자만이 진정한 용서의 설교를 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음을 새삼 반성해 봅니다.

만약, 지난날 나에게 악한 일들 한 자들이 내 앞에 서 있을 때 나는 이들처럼 용서의 관용을 베풀 수 있겠는가? 십자가상에서 자신 심장에 창을 찌른 로마 병정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외치셨던 우리의 주님의 용서를, 돌 매질로 자신을 피투성이가 되어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용서를 베풀었던 스데반 집사처럼, 온갖 몹쓸 짓을 했던 나치 장교 앞에서 코리텐 붐(Corrie Ten Boom) 여사처럼,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앞에선 요셉처럼,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창 50:19-20)” 이것이 진정한 용서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마태복음 10장 8절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짧은 말씀에는 “선물”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짧은 한 구절에 무려 4번이나 강조되어 나옵니다. “용서의 선물, 은혜의 선물, 회복의 선물을 거저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 너의 원수에게도 거저, 선물을 주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주께서 살 찢어 피 흘려 주신 그 위대한 용서를 체험하고, 그 용서의 감격으로 내게 상처 준 자를 용서할 능력을 얻고, 그 평강과 그 기쁨으로 우리 삶의 발걸음을 내디딜 때, 온전한 주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인생수업>(Life Lessons)의 저자요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ebler-Ross)는 “용서의 첫 단계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일리 있는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나와 똑같은’ 인간임을 생각하면 그 사람의 실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설령,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 사람에게 숨겨진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그 사람의 이상 행동은 이상 심리에서 나오고, 이상 심리는 그 사람이 과거에 받은 심한 상처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그 사람에 대한 전 이해가 되어집니다.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의 글에 보니 재미있는 수식(數式)을 소개했습니다. (5-3=2)라는 수식입니다. 오해(5)에서 세 발자국(3)만 떨어지면 이해(2)가 된다는 뜻이랍니다. 또 다른 수식도 있습니다. (2+2=4)라는 수식입니다. 이해(2)에 이해(2)를 더하면 사랑(4)이 된다는 뜻이랍니다. 예수님의 수식은 무엇입니까? 오른 뺌을 때리면 왼뺨까지 대면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수식입니다. 70번씩 7번하라는 수식입니다. 무한대로 하나님께 받은 자답게 무한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영을 받아 사랑할 수 없는 자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도 그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용서하면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의 마음은 저 낮고 낮은 계곡에서 저 높고 높은 정상. 저 자유의 뭉게구름이 아래로 보이는 로키산(Rocky Mountain) 꼭대기(summit)에 선 감동의 마음입니다.

성령님이 내 영혼에 주신 감동이요 하늘의 이슬비입니다. 봄, 여름을 지나면서 그처럼 푸르던 로키산이 가을 햇살에 그처럼 아름다운 금색 빛 아스펜 잎들이 떨어진 낙엽 더미에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바라보는 저의 마음에는 하얀 백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이 만드신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싶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2023년에는 심령의 하얀 세마포를 깔끔이 입고 주님을 뵈옵고, 사랑이 풍성하고 용서의 샘물이 넘치는 삶으로 이웃과 더불어 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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