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롭게 하시는 주님이시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애가 5:21-11)
[1] 전적 부패하고 무능력한 인간의 실상을 폭로합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증거했읍니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라고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 구원의 전적 은혜성은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을 통하여 밝히 증거되었습니다.
로마서 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로마서 9:18,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인간은 원죄와 자범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하고 무능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아담 안의 모든 인간이 출생 때부터 죄 중에 거하였고(시 51:5) 또한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 6:5)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죽은 자요(롬 5:12)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힌 자요(딤후 2:26)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소경과 귀머거리요(막 4:11), 깨닫지도 분별할 수도 없는 상태(고정 2:14)에 처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욥기 14:4에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라고 질문한 후 그 대답은 “하나도 없나이다”였습니다.
레위기 13장 23절 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라고 질문한 후 그 대답도 역시 “할 수 없다”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죽어 무덤 속에 장사된 나사로의 시체와 같이 손발이 꽁꽁 묶여있고 생명의 호흡이 멎어버린 상태에 있기에 바울은 타락한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살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로만 우리 구원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2] 구원이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사실을 밝힙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는 기도는 사람이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력해져 있음과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예레미야의 핵심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란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우리의 구원도 은혜로 얻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 2:8). 그러므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고전 15:10)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중세 로마교회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말로 구원의 완성을 위한 인간의 선행을 힘써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로”라는 성경적 구원의 핵심적 진리를 선언하였다. 칼빈은 “구원을 전적으로 값없는 은혜에 의한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로 생각해야만 한다”(주석, 이사야 49:7)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로마교가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혼합하려는 것은 사실상 은혜를 폐기하고 참된 구원을 훼손하는 것일 뿐이며, “마치 사람이 포도주에 진흙투성이 쓴 물을 타는 것과 똑같다”(기독교강요 2.5.15)고 비판하였습니다.
[3] 반드시 역사의 주께서 만물을 새롭게 회복하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다시 새롭게” 하신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새롭게”, “새로운”에 해당하는 “카이노스”(καινός)는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전례가 없는”, “믿기 어려운 전혀 다른 것”이 존재 자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신약 성경에서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이란 현존하는 하늘과 땅과 근본적으로 새로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지 시간적으로 새로운의 의미를 지닌 “네오스”로 다른 의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새 창조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옛사람이 죽고 중생되어 부활의 영광을 입게 될 새사람을 또한 새 창조라고 합니다.
카이노스의 이러한 용례는 특히 신약성경의 종말론적이거나 구속사적인 전환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발견됩니다.
바울에게서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생명에 이를 때에 새 창조에 참여하게 됩니다(고후 5:17; 갈 6:15).
창세기의 첫 두 장이 새로운 시작, 즉 처음 창조의 원형이라면 성경의 마지막 두 장은 새 창조 이야기로 재환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어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부활하여 다시 일어날 때까지 그 영혼이 안식하는 중간상태에 거하는 곳을 성경은 “하늘” 혹은 “낙원”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곧 “심판과 멸망의 날”, 곧 “주의 날”에 새롭게 창조될 세상 “새 예루살렘”을 말합니다(사 65:17; 사 66:22; 벧후 3:7-13; 계 21:1-5). 이곳이 바로 믿는 자가 부활의 몸을 가지고 들어가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곳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 혹은 “낙원”은 죽은 자의 영혼이 부활 전까지 안식하는 곳이며, “새 하늘과 새 땅” 혹은 “새 예루살렘”은 심판 이후 구원을 얻은 자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영원한 나라입니다.
[기도]
역사의 주권자 되신 주님, 시대가 악합니다. 주의 진로 아래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아직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이시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만물보다 더 썩었고 더럽고 냄새나는 인간입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역사는 종말로 향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 때가 점점 가까이 다가 오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사용하는 선한 도구, 의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