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모 목사의 시편 강해(2) 시편 1편(2) –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1. 2. 적극적 측면에서 의인: 행하는 자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2.1. 의인은 율법을 즐거워한다.
그의 기쁨은 여호와의 율법에 있다. 시편 전반에 걸쳐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처음 다섯 권, 모세 5경의 “율법” 부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일컫는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한다.
“즐거워한다” 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하며 기꺼워하며 적극적으로 그분의 언약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습을 가리킨다(시 40:8). 의인, 즉 언약의 백성은 그분의 언약의 말씀을 평생 읽고 준수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할 수 있는 길이다. 그 결과 복과 생명을 얻고 형통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감격하게 하는가? 이것들이 바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만약 자신의 개인적인 즐거움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그 사람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즐겁다면 더 좋을 수도 있지만 이것 역시 여전히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 의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이다.
마틴 루터(Matin Luther)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낙원에서도 살 수 없지만, 하나님 말씀이 있으면 지옥에서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표현에 동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어떤 기쁨, 어떤 최고의 즐거움을 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결코 진공 상태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가치 없고 실망스러운 것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라고 스펄전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적절하게 설명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에게 그것을 해달라고 애원하거나 좋아해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는 혼자서 모든 일을 잘해 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쁨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그 말씀을 사모하고 열망하는지를 측정할 수 있다.
1.2.2. 의인은 율법을 묵상한다.
“묵상”(하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읽는다”는 뜻이다(수1:8; 시63:7; 시73:13; 시 143:5: 사33:18). 묵상의 대상은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자신(시 63:6), 그분이 행하신 기이한 이들(시77:12: 143:5) 등이다.
의인은 주야로 주의 거룩한 말씀을 묵상한다. 의인은 날마다 생명의 말씀을 묵상한다. 의인은 단지 말씀을 읽거나 듣고 곧 잊어버리지 않는다. 의인을 읽거나 들은 말씀을 깊이 생각한다. 자신의 삶이 비추어 본다. 깊이 말씀을 되새기고 음미하고 적용한다.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의 모습은 진솔하게 투영해 본다. 자신이 걸어온 삶, 걸어갈 삶에 대한 주님의 뜻을 찾아본다. 감사할 내용을 찾아 감사드리고, 회개할 모습을 찾아 회개한다. 결단하고 다짐하고 행동에 옮긴다.
말씀 묵상은 동양 명상과 전혀 다르다. 동양의 명상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그러나 명상은 위험한 종교적 심리적 행위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공허한 마음은 속임수나 악마의 영에 대하여 자신을 공개적으로 열어놓기 때문이다. 그 비우는 마음에 미혹의 영과 잡다한 생각들이 침투하기 쉽다. 그러나 기독교 묵상에서 목표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것은 각 단어와 문구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주님께 다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과 교통과 교제가 이루어진다.
스펄전(Spurgeon)이 인용한 애쉬우드(Ashwood)는 “묵상은 새김질을 하고 말씀의 감미로움과 영양이 있는 덕을 마음과 삶에 가져온다. 이것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방식이다.”라고 했다. 또한 스펄전은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읽기만 하고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부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독서뿐만 아니다. 영혼은 내부적으로 그것을 먹고 소화한다. 어떤 설교자가 무릎을 꿇고 성경을 20번이나 읽었지만 거기서 선택의 교리를 발견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설교자는 매우 불편한 위치에서 읽었을 뿐이다. 만약 그가 안락의자에 앉아 그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으면 그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의인은 적극적으로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한다
1.1.3. 의인이 받는 복.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의인이 받는 복은 항상 생명의 물이 있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강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항상 물이 있다. 의인은 항상 필요할 때, 곧 바로 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시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끊임없이 궁핍하거나 갈증을 느낄 때, 우리 자신이 물있는 강가에 심겨졌는지 아닌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의인이 받는 복은 뿌리가 깊이 내린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튼튼하고 안정적이며 뿌리 깊은 곳으로 뻗은 는 나무이다. 의로운 사람의 삶은 강인함과 안정감을 그 특징으로 한다. 나의 삶이 튼튼하며 안정적인가로 내가 어디에 심겨져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의인이 받는 복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 의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갈 5:22-23).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자연적으로 열매가 맺히게 된다. 그 나무는 생명의 근원에 심겨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 과일에도 계절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으로 행하기 시작할 때 낙담하며, 즉시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열매를 맺을 제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트랩(Trapp)은 “하나님의 과수원에는 불필요한 나무가 없다. 그러나 때로는 사과나무가 그러하듯이 열매가 맺지 못할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얼마가 지나다 보면 농부의 돌봄으로 다시 윤택하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라고 위로의 언급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의인은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한다.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하고 시들어 말라버리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에게는 이러한 죽음의 흔적과 메마름의 흔적이 있지 않는다. 그의 “잎”은 녹색이고 살아 번성한다.
의인이 하는 일은 다 형통하게 된다. 의로운 사람은 고난과 역경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아니다. 의인은 항상 형통한 길만 열리는 것이 아니다. 의인이 하는 모든 일이 항상 부유하고 편안하고 번성한 것만이 아니다. 그러나 의인의 삶도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역경 속에 거하게 될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한 것으로 인도해 주신다. 아무리 어려운 고난의 파고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악인의 길.
2.1. 위험한 악인의 길
4절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2.1.1. 악인은 의인과 같지 않다.
의인에 대하여 언급된 모든 사실이 해당되지 않는다. 즉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안정적이고, 계속해서 생명과 자양분을 얻고, 열매를 맺고, 살아 있고, 번영하는 모든 것이 악인 곧 불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때로는 불경건한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들이 의인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악인의 삶에서 잠깐 머물다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것뿐이다. 결국 실제로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2.1.2 악인은 겨와 같다.
겨는 곡식 알갱이 주위를 둘러싼 얇은 “껍질”이며, 곡식 알갱이가 가루가 되기 전에 벗겨야 할 것들이다. 성경에서 “겨”는 “무가치 것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시35:5:욥 21:18; 사5:24; 사 17:13; 사29:5; 사33:11; 사41:15; 단2:35; 호13:3; 습2:2; 눅3:17). “겨”는 악인의 허무함을 비유한다. “바람에 나는 벼”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의 견고함과 비교가 된다.
왕겨는 바람에 쉽게 날아가 버려 낟알과 쉽게 분리될 정도로 가볍고 가치 없는 존재이다. 성경은 바로 불경건한 자들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실체가 의미 없고 허무한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스펄젼(Spurgeon)은 “왕겨는 본질적으로 무가치하고, 죽었고, 쓸모없고, 실체가 없고, 쉽게 날아갑니다. 이것은 바로 나무와 왕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라고 했다.
2.1.2 악인은 결국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지 못한다.
5절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악인에게는 무게가 없으므로 심판 날에 부족함이 드러나고 만다. 다니엘서에서 벨사살 왕에 대하여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말한 바와 같으니 왕을 저울에 달아 부족함이 나타났느니라”(다니엘 5:25-27).
일순간 의인의 회중 안에 있는 죄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미래가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죄인은 의인과 같은 영광스러운 미래를 공유하지 못한다.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죄인으로 남아 있기를 고집한다면 자신들이 의인의 회중에 속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임’은 회중을 의미한다. 회중은 ‘company’라는 의미(떼, 모인 사람들, 친구, 단체, 회사, 회합 등)가 있다. 또한 ‘generation’이라는 의미(세대, 자손, 일족 등)도 있다(시 14:5). 회중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회”를 가리킨다(겔 13:9).
회중은 “여호와의 장막에 유하며, 성산에 거하는 자들”이다(시 15:1-2). 회중은 “성일을 지키는 무리”를 말한다(시 42:4). 회중은 “성도들의 총회”를 의미하며, “성도들의 집회”를 의미한다(시 149:1). 결론적으로 의인의 회중(the congregation of the righteous)은 현세적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서 사랑과 돌보심 속에서 주어지는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의미한다. 또한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무리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결론)
의인과 악인의 종국
“6절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을 아시나니 의인은 평안할 것은 하늘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심이라.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길을 아신다”라고 되어 있다. 스펄전은 “그분은 끊임없이 그들의 길을 바라보고 계신다. 비록 그것이 종종 안개와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아신다.”고 했다.
그러나 악인, 죄인, 불경건한 자의 길은 망할 것이요 불경건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른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그들은 지금은 편안한 길, 넓은 길, 번영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요, 결국 그들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인생사는 두 길을 걷는 것이다. 의인의 길, 악인의 길, 그 길은 종국의 길이요, 날마다 결정짓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길 되시고 진리 되시고 생명 되시는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복된 자들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