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산책
수도원 운동에 대하여 관심이 간다. 이유는 오늘날 현대교회가 급속도로 세속화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4세기 초에 시작,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운동이 바로 이 시대 교회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당시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지하에서 지상교회로 전환되면서 교회는 빠른 속도로 세속화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작은 움직임들이 이집트와 시리아 부근에서 수도원적 은둔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수도원”이란 말은 그리스어 <monachos>에서 출발된 단어로서 “은둔”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 싹튼 이 운동은 세속에 대한 배척과 심지어는 문명과 문화에 대한 경멸을 표현한 적극적인 몸짓이었다.
맨 처음 이 수도원 운동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적지 않은 문제점으로 대두되기도 하였으나 점차 교회의 참여도를 높이게 되면서 오히려 후원 내지는 장려, 심지어는 지도자들조차도 적극 참여하는 정도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수도원주의의 지도자로서 유력자가된 <안토니우스>는 예수님의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19:21)
라는 말씀에 감동과 도전을 받고 모든 재산을 처분, 은둔생활에 들어갔으며 후에 존경받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당시의 수도사들은 엄격한 금욕과 공동생활을 영위하였는데, 주로 그들의 하루 일과는 노동, 기도, 명상(성경구절) 등을 하면서 재산을 공유하고 질서에 순종하는 관습을 익히고 배웠다. 세상의 모든 영광과 물질의 풍요를 뒤로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을 초개처럼 여기며 일평생을 그렇게 수도사로 살다가 미련없이 떠나갔다.
오늘날 이 시대 교회에 바로 이 수도원적 자세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교회뿐 아니라 한국의 그 많은 기도원(미국도 마찬가지이다)까지도 세속화의 홍수가 범람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기존의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진리를 찾아 헤매이는 수많은 영혼들이 자구만 늘어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배당은 많되 참된 교회를 찾을 수 없으며, 목사는 넘쳐나지만 진실된 주의 종을 만나기가 해변에서 바늘 줍기처럼 어렵고, 가르침은 성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지식이 결여 되어있는가 하면(호4:6) 여기 저기 설교자의 목소리는 우렁차되 영혼을 살리는 영성의 소리를 어디로 사라졌는가! 말씀의 기갈 현상이다(암8:11).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이러한 교회 환경의 한 복판에 살고 있다. 이는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임일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 한번 시간을 돌이켜 교회사 속의 지나간 중세로 돌아가 암울했던 시대에 한줄기 강렬한 빛을 발하던 그 수도원 운동을 한번 일으켜 봄 직하지 않을까? 마음을 찢으면서 말이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며 주,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지어다”(욜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