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21, 2024

[역사기획/ 낙도로 간 선교사들] (8)울릉도로 찾아간 맥켄지

인기 칼럼

박원희 목사(낙도선교회)

비누아트의 땅끝과 한국의 땅끝 시공간 초월한 선교영성

제임스 노블 맥켄지(한국명 매견시·1865-1956)가 울릉도를 방문하기 한 해 전인 1909년, 울릉도에는 이미 여러 교회들이 설립되어 있었다. 선교사에게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삼척 출신 감리교인 김병두 씨가 울릉도에 정착하면서 가장 먼저 울릉도교회가 세워졌다. 또한 그의 선교를 통해 나리교회(현 천부제일교회), 장흥교회(현 간령교회), 저동교회(현 동광교회), 도동교회(현 도동제일교회)가 연이어 세워지며 1909년 한 해에만 4개의 교회가 들어서게 된다. 이 교회들을 든든히 세우고, 울릉도 선교의 복음화에 견인을 한 것이 맥켄지 선교사이다. 나리교회의 역사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맥켄지 선교사의 울릉도 선교루트를 보여주는 지도.

“1909년 3월 나리동에 거주하던 함영수 송광수 등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1910년 송광수가 경북 경산에서 매견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나리동 176번지에 정착하면서 본인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당시에는 나리동교회로 불렀다. 울릉도에서 처음 성례식을 베푼 맥켄지 목사는 이후 경상노회의 파송을 받아 울릉도의 순행목사(巡行牧師)로 시무한다.”(이연경, <100년을 하루같이 울릉도 복음의 등대가 되어 온 세 교회>)

‘땅 끝’ 정신으로 섬을 향하여

비누아트 산토섬에서 한국의 울릉도까지 ‘땅끝’ 섬을 찾아간 제임스 노블 맥켄지 선교사.

맥켄지 선교사가 울릉도에 들어간 이유는 첫째, 울릉도 교회들이 세워져가는 과정에 선교사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울릉도의 첫 전도자 김병두가 감리교인이었지만, 당시 울릉도를 관할하는 경상도는 호주장로교선교부가 담당한 지역이었기에 맥켄지는 교회들을 돕기 위해 울릉도로 들어가게 됐다. 한국에 오기 전 맥켄지는 비누아투에서 섬 선교를 한 경험이 있어, 호주선교부는 울릉도 선교에 맥켄지가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두 번째 이유는 앞서 나리교회 관련 기록에 나온 것처럼 맥켄지가 경산에서 송광수라는 울릉도 사람을 만나 세례를 주면서, 울릉도 선교에 직접 연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부산 울산 포항 등을 거쳐 울릉도로 배를 타고 들어가는 데는 이틀이나 소요되었다.

먼 뱃길 여행이었지만, 맥켄지는 1910년을 필두로 울릉도에 총 8회 정도 들어가며 순회선교를 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부터 1917년까지는 거의 매년 울릉도를 방문한 기록들이 있다. 맥켄지의 1914년 선교보고를 보면 울릉도에 복음이 활발하게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개월 전 내가 처음 울릉도를 방문했을 때, 세례 받은 자는 성서공회의 매서인 한 명 밖에 없었다. 지금은 67명의 남녀가 세례를 받았고, 101명이 세례학습자로 나의 명단에 기록되어 있다.”

임신하여 만삭인 몸으로 울릉도 선교에 동행한 메리 켈리 맥켄지 선교사.

1915년에는 아내 메리 켈리 맥켄지 선교사가 울릉도 선교 길에 동행했다. 메리 선교사와는 한국에서 만나 결혼한 사이였다. 당시 메리는 임신 중이었으나 울릉도로 여행을 주저하지 않았다.

“복음을 갈망하고 있는 울릉도 여성들과 소녀들을 가르치고 믿음을 나누기 위해서 갔다.”(<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에서)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 있는 곳, 복음이 필요로 하는 곳. 그 어느 곳이든 찾아가는 ‘땅끝’의 정신이 이 부부를 울릉도로 향하게 한 것이다. 맥켄지는 1927년 마지막으로 울릉도를 방문한다.

사진 / 배를 타고 선교여행을 떠나는 맥켄지 선교사의 모습.

비누아투에서 울릉도까지

맥켄지 선교사는 한국으로 오기 전 비누아투 에스피리투 산토섬의 노구구(Nogugu)라는 지역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비누아투의 섬들에는 1881년부터 런던선교협의회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선교사들은 식인종이었던 원주민들에 의해 곤봉에 맞아 죽거나, 잡혀 먹혔다. 맥켄지는 바로 그 희생 위에서 담대하고도 효과적으로 사역했고, 결국 교회를 세웠다.

자신의 첫 아내인 마가레트 블레어를 맥켄지는 에스피리투 산토섬에서 선교하던 중 하늘로 떠나보냈다. 맥켄지는 당시의 심정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아내를 잃은 충격과 함께 몸이 쇠약해진 맥켄지는 14년간 펼쳐온 노구구 사역을 중단한다.(이후 한국에서 메리 제인 켈리 선교사와 재혼한다)

한국에서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선교위원회에 자원하여 신청한 맥켄지는 1910년 한국으로 출발한다. 맥켄지가 한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노구구의 교인들은 칡, 활과 화살 그리고 자신들이 가진 다른 물건들을 팔아 모은 돈 200파운드를 선교비로 내주었다. 그 선교비가 울릉도교회를 짓는데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공식 기록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맥켄지가 1910년부터 마산선교부를 담당했을 때, 그 부근의 40여 개 섬을 복음화하기 위해 산토섬 교우들의 헌금으로 배를 건조하길 소원했다. 그리고 그 배 이름도 ‘산토’라고 짓기를 원했다.

울릉도를 비롯한 경남 일대의 섬들에 복음을 전한 맥켄지 선교사의 기념비와 한국인 성도들.

“내가 전도한 산토교인들이 200파운드를 선물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한국선교를 위해 모터보트를 사도 좋다고 하였다. 내가 그 배를 사면 산토라고 부를 것이다.”(1911년 12월, 맥켄지 선교보고 중)

일본의 방해로 이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 재정이 울릉도를 비롯한 경남 일대의 섬 선교에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결국 울릉도 선교는 비누아투인들에게도 빚을 진 셈이다.

훗날 한국의 원천희 선교사가 경비행기로 비누아투를 방문했을 때, 원주민들이 여러 방문자 중 자신을 특별하다 싶을 정도로 극진히 환영해주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과 함께 지내다 한국으로 간 맥켄지 선교사 때문인 것을 알고 원 선교사는 다시 놀랐다고 한다.

비누아투 사람들은 산토에서 선교한 호주선교사(맥켄지를 지칭한다)가 한국으로 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지금은 그 열매로 한국에서 자신들에게 선교사를 보내준 것이라 믿는다고 한다. 현재는 한국인 선교사들을 비롯해 44명의 선교사들이 비누아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비누아투에서 선교사역을 펼치던 시절의 맥켄지 선교사.

“맥켄지는 선교스테이션에서 떨어진 많은 섬들을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문하고 있다. 그곳 섬사람들에게 선교사의 방문은 처음이다. 우리는 그들을 지속적으로 돕길 바란다.”(1913년, 아내 메리의 선교보고 중)

맥켄지 선교사는 한국의 울릉도와 비누아투의 산토섬이라는 ‘땅끝’과 ‘땅끝’을 시간을 초월하여 연결시킨 선교사이다. 땅끝을 섬기는 것은 손해가 아니다. 인간은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섬긴다. 돌아오지 않는 것, 손해 보는 것은 섬기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섬김은 언제나 돌아온다.

복음이 필요한 곳, 복음의 요청이 있는 곳에 까닭 없이 섬기는 섬김의 확장성이 한국교회에 지속되길 기도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공하는 자가 아니라, 까닭 없이 섬기는 자이다. 땅끝, 섬은 까닭 없이 섬기는 자의 몫이다.

연재를 마치면서

한국의 섬으로 들어간 초기 선교사들은 수없이 많다. 다소 아쉽게도 필자는 이번 연재에서 모든 선교사들을 다 다루지 못했다. 선교사들은 병들어 죽기도 하고 아내 남편 자녀를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땅끝’을 찾아가 사역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힘이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바로 영성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과 제자들의 영성, 모라비안의 영적대각성과 그들의 영성, 17~18세기의 영적대각성과 학생자원운동의 영성이 마침내 한국의 땅끝 섬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땅끝을 향하는 영성이 있는지 자문해보자.

선교에는 전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영성 없는 전략은 땅끝으로 가지 못한다. 땅끝은 언젠가 중심이 되지만, 다시 새로운 땅끝을 향해 나아갈 때 영성이 그 중심에 흐르게 된다. 중심은 땅끝을 섬기고, 땅끝은 중심을 세운다. <끝>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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