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21, 2024

[역사기획/ 낙도로 간 선교사들] (6)한국 최초의 선교사 이기풍 제주도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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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희 목사(낙도선교회 대표)

목소리 바치고 생명 바쳐 섬마을에 복음 외친 천국 메신저

예수를 믿기 전 이기풍 목사는 1891년부터 1893년까지 평양에서 포졸 일을 했다. 이때 만난 사무엘 모펫(한국명 마포삼열) 선교사를 핍박하기도 했으나, 이후 회심한 그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인 최초 장로교 목사 7인 중 한 명이 되었다.

당시 조선독노회의 결정에 따라 이기풍 목사는 1908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받는다. 이기풍 목사는 평양에서 목포 양동교회로 이동해 한 달 정도 머물다, 1908년 2월 배를 타고 목포항에서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독노회는 왜 한국 최초선교사 파송 지역으로 제주도를 정했을까? 그 이유를 차근차근 알아보자. 이야기의 시발점은 김재원이란 인물이다.

이기풍 목사의 제주순례 선교루트를 보여주는 지도.

왜 제주도였을까

제주 성외지역에 살던 김재원은 중병에 걸렸으나 제주도에서는 치료할 수 없었다. 목포에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로 찾아갔더니, 선교사들은 다시 서울에 있는 제중원을 추천했다.

결국 서울까지 올라간 김재원의 상태를 제중원 원장 에비슨 선교사가 살펴보았다. 병세가 너무 심각해 치료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에비슨은 “당신의 생명은 예수님께 달려있으니,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했고, 그로 인해 김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한국 장로교회 최초 선교사로 제주에 파송된 이기풍 목사.

제중원에서 김재원을 돌본 사람 중에 한국인으로 곤당골교회(현 승동교회)에 다니던 박서양이라는 이가 있었다. 백정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당대의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의사로서, 교회 장로로서 성장한 인물이었다. 제중원 그리고 에비슨과 박서양을 통해서 복음의 놀라운 가치를 전수받은 김재원은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퇴원하여 쪽 복음을 받아 들고 제주도로 돌아왔으나, 박서양은 자신의 지식과 능력만으로는 복음 전도가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래서 제주도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제중원의 에비슨에게 간곡히 요청했고, 에비슨은 다시 평양신학교 교장 마포삼열에게 같은 부탁을 했다. 그리고 이 요청에 따라 평양신학교의 첫 졸업생인 이기풍이 제주 선교사로 파송받게 됐다.

이기풍 목사의 제주 부임 후, 김재원은 그를 도와 제주도의 첫 교회인 성내교회를 설립했고 나중에는 장로가 된다. 제주의 영혼들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김재원과 에비슨과 마포삼열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이기풍 목사를 제주 선교의 개척자로 사용하신 것이다. 왕이신 하나님은 한국의 땅 끝, 제주를 사랑하셨다.

유배 온 박영효가 선교조력자로

이기풍 목사가 제주의 첫 교회인 성내교회를 세우는 데 재정적으로 적극 도운 인물이 당시 개화파 거두로 이름난 박영효 대감이다. 왜 예수를 믿지도 않았던 사람이 성내교회 예배당을 구입하는 데 막대한 헌금을 하게 된 것일까?

제주 이기풍선교기념관에 세워진 기념비.

박영효의 도움은 이뿐 아니었다. 1909년 5월 5일 <한성순보>에 이기풍 목사의 선교 보고 내용이 실렸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제주 사람들을 폄하하는 것처럼 오해를 산 대목이 있었다. 이를 전해 듣고 분개한 사람들이 이기풍 목사를 돌로 쳐 죽이려 할 만큼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위험을 막아준 인물도 박영효였다.

박영효는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그런데 갑신정변 때 큰 부상을 입었던 민영익을 의료선교사 알렌이 치료하여 극적으로 회복시켰고, 이를 계기로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세워졌다. 한편 갑신정변 실패로 주동자들이 대부분 극형에 처해지는 상황이었지만, 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 후 면책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박영효는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 복직된 박영효는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 대신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1907년 제주로 귀양을 왔고, 이듬해 제주 선교사로 부임한 이기풍을 만났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박영효는 기독교를 통한 조선의 개화를 기대하며, 이기풍을 도운 것이다.

성내교회 예배당으로 사용할 출신청의 구입비 100원을 기부한 후, 박영효는 1910년 6월 귀양에서 풀려나 경성으로 돌아간다. 김재원이나 에비슨과 마찬가지로 박영효 또한 제주도에 복음을 전하려 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던 인물이다.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늘 버림 받은 지역이었다. 유배지이며, 수탈의 땅이었다. ‘말을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에는 제주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는 부정적인 뜻도 숨어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조선시대 관리들 중 제주가 임지로 결정되면 도망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땅의 영혼을 사랑하신 주님은 선교사 마포삼열을 핍박했던 이기풍을 변화시켜 선교사로 보내셨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제주에 임했다.

이기풍 목사가 세운 제주 성내교회의 첫 예배당이 된 출산청은 박영효 대감의 재정후원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복음을 위해 목소리를 잃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선교사직을 사임한 것은 ‘성음부족증’이란 이름의 병이 생겼기 때문이다. 성음부족증은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병이다. 이기풍은 복음을 너무 많이 전해, 목소리까지 잃게 된 것이었다.

이기풍 목사가 세운 성안교회를 필자가 방문했을 때, 교회 직원인 자매가 “목사님, 이 동네 길 이름이 ‘복음로’입니다. 옛 이름은 ‘복음 신작로’입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이 길을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복음을 외쳤는지 사람들이 이 길을 복음의 길이라고 했고, 그래서 관청에서 복음로라고 이름 붙였다고 해요. 그런데 요. 근래 도로명이 바뀌었어요”라고 일러주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목소리를 잃어버린 복음전도자, 선교사 이기풍!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그래서 길 이름을 사람들이 ‘복음로’라고 불렀다니! 얼마나 행복한 길인가? 필자도 그 길을 걸으며 외쳐보았다. “예수 믿으세요!”

배를 타고 전도여행을 다니는 이기풍 목사의 모습을 담은 그림.

과연 나의 인생에 복음을 열심히 전한 복음로가, 순례의 길이 있는지 되새겨 볼 일이다. 제주도 해안길은 이기풍의 전도 순례의 길이었다. 해안길을 따라 복음을 전하던 그가 의식을 잃었을 때 해녀가 구해준 적도 있었다. ‘예수 천당’을 외치느라 목소리를 잃어버렸지만. 바로 그 제주 해안길 위에 수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현재 제주도의 공식적인 복음화율은 7.5%이다. 그 중에서도 토착인의 선교비율은 4.5%에 불과하다. 매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방문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제주를 즐겨 찾는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고, 무엇을 주려고 제주를 찾는가? 아직도 제주에는 52개의 무교회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우리에게 복음의 길, 선교순례의 길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는 과연 복음으로 잃어버린 목소리가 있는 지를 묵상해볼 일이다.

이기풍 목사가 순교할 당시 여수 우학리교회의 풍경.

이기풍의 순교지 여수 금오도

훗날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제10회 총회장을 지낸 이기풍 목사의 마지막 사역지는 여수의 남쪽 섬, 금오도였다. 순천선교부 프레스톤 선교사의 권유로 이기풍 목사는 벌교읍교회를 거쳐 금오도 우학리교회로 들어갔다. 총회장까지 지낸 인물이 작은 섬마을 교회로 향해간 이유는 간단했다. 복음이 필요한 곳, 복음의 요청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는 선교정신 때문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우학리를 중심으로 금오도 주변 일대의 섬에 돛배를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돌산, 안도, 연도 등을 돌며 순회선교를 하였다. 그가 뿌린 씨앗이 지금도 여수 남부 24개 마을, 23개 예배당으로 남아 있다.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기풍 목사는 4년간의 옥고 끝에 병으로 출옥하지만, 1942년 6월 20일에 75세 나이로 천국 입성을 한다. 제주도에서 시작한 그의 목회는 여수 금오도에서 마감됐다.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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