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21, 2024

[성탄특집] 성산 장기려와 부산 그리고 성탄절

인기 칼럼

성탄절에 선물처럼 찾아온 피난민들의 영원한 은인

가난 때문에 치료 못 받는 환자가 없는 세상 위하여 끝없는 사랑과 헌신

옥탑방 사택에 의사 가운과 청진기 하나씩만 남기고 성탄절 새벽에 별세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장기려는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리고 가족들을 돌보는 마음으로 환자들을 대했다.
생전의 장기려는 자신의 동상을 만들려는 제자들의 시도에 몹시 역정을 내며 반대했다. 고인의 사후 17년만인 2012년이 돼서야 그의 흉상이 부산대양산캠퍼스 의과대학 건물 뒤편에 ‘성산원’이라는 이름의 작은 정원과 함께 세워졌다.

그날은 성탄절 새벽이었다. 85세의 노인이 서울 백병원의 한 병실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새벽 1시 45분 결국 그의 숨이 멎었다. 빈소가 차려졌고, 부음을 전해들은 서울 산정현교회 김관선 목사가 새벽예배를 마치자마자 장례식장으로 달려왔다. 첫 번째 문상객이었다.

“장로님,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시는 군요.”

슬픔과 탄식은 김 목사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발길은 전국에서 이어졌다.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여야 국회의원, 국립대총장 등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이들의 조문과 조화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답지했다.

가난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가 없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립한 장기려.

장례식 당일에는 수없이 인파가 몰려 경찰이 교통을 통제해야 할 정도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생전에 고인으로부터 크고 작은 은덕을 입은 이들, 그리고 고인으로부터 의로운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었다.

성산 장기려는 1995년 12월 25일 주님 곁으로 갔다. 생전에 주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본 적 없던 그였기에, 어쩌면 주님과의 기쁜 동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탄절이 돌아올 때마다 그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짙어지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1950년 12월 장기려의 발길이 처음 닿았던 전쟁 피난민들의 도시, 바로 부산 사람들이다.

장기려가 평생 거처로 삼은 병원 옥탑방에 남긴 의사 가운과 청진기.

피난촌 부산에 첫 발을 딛다

“장로님은 가장 먼저 저희 교회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무래도 당시 이북에서 내려오신 목회자와 성도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교회였고, 무엇보다 장로님과 함께 평양 산정현교회에 계셨던 한상동 목사님이 당시 우리 교회에서 시무하신 이유가 크겠지요.”

김대훈 목사는 초량교회와 장기려 장로의 만남을 계속 설명해 나간다. 장기려 장로가 부산에서 첫 주일예배를 드린 것은 1950년 12월 24일 성탄 하루 전이었다. 이후 한동안 이곳에서 피난민들과 함께 예배하고, 자신을 여기까지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며 남은 생의 비전을 발견했을 것이라고 김 목사는 추측한다.

실제로 당시의 초량은 갑자기 급증한 인구로 인해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붐비고 있었다. 산꼭대기까지 올라와 사람들은 어설프게 판잣집을 짓고, 산복도로라 불리는 구불구불한 길을 만들어냈다. 전기도 물도 공급되지 않는 달동네에서 사람들은 가난과 추위의 공포에 시달렸다. 열악한 환경에 동상과 영양실조 환자들이 속출했고, 전염병까지 번져갔다. 장기려에게는 이 끔찍한 풍경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전쟁이 터진 첫 해 겨울, 자신이 살던 평양을 떠날 때 그는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부모와 아내 그리고 자녀들과 영영 작별하게 된 것이다. 다섯 자녀 중 유일하게 차남 가용만 데리고 월남하는 과정에서, 피난길에 오른 아내와 자식들의 뒷모습을 발견했지만 끝내 함께하지 못했다. 그 순간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며 그는 한 가지 결심한 바가 있었다.

“불쌍한 이웃을 위해 일해야겠다. 내가 일하는 만큼 북에 남겨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되겠지.”

장기려가 피난민들을 위한 무료진료소로 시작한 고신대복음병원의 천막진료소 시절.

무료로 치료하는 복음진료소

이미 북에서 의학적으로 대단한 성과를 이룩한 데다,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집도했다는 과장된 소문이 따라다닐 정도의 명의였기에 장기려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았다. 본인만 원한다면 부와 명성을 축적하며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일자리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고신대복음병원 현재의 모습.

하지만 부산에 내려올 때부터 그에게는 개인적 영달에 대한 욕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겠다는 목표 하나만 갖고, 그는 피난민들 사이를 누비며 자신의 일터를 수소문했다. 그 와중에 북에서 내려온 간첩으로 오해받아 정보기관에 끌려가서는 일주일 동안 온갖 고초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마침내 길이 열렸다. 미국 유학 중에 5000달러를 모금해 급히 귀국한 전영창 선생과 한상동 목사의 주선으로 남항동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진료소를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곳에 ‘복음진료소’라는 이름을 붙이고 피난민들을 위한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단 하나의 오진도 나지 않게 하리라는 결의에 찬 기도를 올리며 그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개원초기 하루 60명 수준이던 환자들 숫자는 입소문을 타고 점점 늘어났다. 작은 창고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인근 영선초등학교 옆 공터에 천막 세 개로 가건물을 짓고 인원을 보강해 규모를 키웠다. 다시 돌아온 성탄절을 목전에 둔 1951년 12월 23일 진료소는 ‘복음의원’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평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던 시절의 모습.

복음의원에서는 찾아오는 환자들만 돌본 게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무의촌을 찾아가 의료혜택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하고 복음을 전했다. 이 사역은 두고두고 복음병원의 전통이 됐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인술(仁術)은 다른 게 아닙니다. 자기 눈앞에 나타난 불쌍하게 여길 것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인술을 할 사람이에요. 그건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 다만 하는가 안 하는가 그 차이지.”

가난한 이들 위한 끝없는 헌신

전쟁은 끝났지만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서울의대 교수직을 맡게 된 장기려는 한 번에 10시간 넘게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강행군을 펼치면서도 복음의원 일을 놓을 수 없었다. 결국 다시 부산의대 교수로 자리를 옮기며 서울 생활을 청산했다. 그 사이 복음의원은 천막시절을 끝내며, 고려신학교와 힘을 합쳐 제대로 건물을 짓고 복음병원 시대를 열었다.

병원의 위상이 바뀌고, 자신의 신분도 달라졌지만 장기려의 인생원칙과 환자들을 대하는 자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가 없어야 한다는 소신은 오히려 더욱 견고해져 수많은 감동적 일화들을 탄생시켰다.

피난민들이 겪는 참상을 목도하며 장기려가 자신의 인생항로를 결정하게 된 부산 초량동에는 장기려기념관과 그의 정신을 실천하는 더나눔센터가 세워져있다.

치료비를 낼 능력이 안 되는 환자들의 곤란한 형편을 자신의 월급으로 해결했던 일, 그마저도 소진된 상황에서 입원비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농부를 위해 직원들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며 퇴원시킨 일, 빈곤한 살림에 잘 먹지 못해 병이 난 환자를 위해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라고 쓴 처방전을 병원직원에게 건네주던 일, 병원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적선할 현금이 없자 거액의 수표를 대신 쥐어줬던 일.

환자들을 향한 그의 한없는 자비와 배려의 열매로 1968년 5월 13일에는 부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창립됐다. 평소에 푼돈을 조금씩 내기만 하면, 유사시 비싼 의료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한 이 방식은 훗날 대한민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민의료보험제도의 산실이 됐다.

그런 아름다운 선행과 위대한 업적들을 이루고도 정작 본인은 자기 소유의 집 한 채 없이 병원 꼭대기의 옥탑방을 사택으로 삼아 평생을 살았다. 이사를 권하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이만한 경치가 없다”며 한사코 거부하던 장기려는 그 옥탑방에 의사 가운 한 벌과 청진기 하나만을 남겼다. 그의 청빈함은 동양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고도 상금 2만 달러 전액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에 기부한 데서도 드러난다.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

그가 성탄절에 찾아와서는, 성탄절에 떠나간 부산. 이미 고인의 사후 2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장기려의 숨결은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있다. 암남동의 고신대복음병원과 장기려거리에, 초량동의 장기려기념관과 더나눔센터에, 양산으로 이사한 부산대의대와 성산원 뜰에.

부산의 성탄절은 그래서 세상 어느 도시보다 따뜻하다.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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