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예배와 설교
회중이 교회에 가는 이유는 설교만 듣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수동적으로 교회에 끌려나와 설교만 듣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설교자가 나오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가? 헌금은 무가치한 것인가? 찬송은 무가치한 것인가?
설교자의 소명은 교회의 예배의 의미를 바르게 가르치는데 있다. 설교자는 자신의 청중들의 주의를 집중시켜 교인들이 단지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에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또 설교가 가장 고상하고 유일한 특징도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함께 섬기고 신자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와 사랑과 예물을 드리기 위해 함께 모인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르게 가르치고 인식한다면 예배를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이 더욱 고귀하고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5-146).
예배라는 것은 한 가지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즉 설교를 듣기 위해서만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가운데 하나가 설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설교에만 관심을 가지고 다른 예배의 의식을 무시하거나 참여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바빙크는 더 중한 책임이 설교자들에게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늘어나는 과실에 대한 회중들의 책임이 그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인식하지 못하는 회중들에게 있다할지라도 더 중대한 책임은 상당 부분 설교자 자신들에게 있습니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6)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예배에 대한 바른 의식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예배에 참여한 회중이 예배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예배에 바르게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예배의 모든 순서들 즉 예전은 모두 각기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임을 확실하게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설교는 예배의 유일한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설교는 제사장적 모임과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상당 부분이 설교에 좌우된다. 종교 의식에서 설교는 가장 위대하고 고상한 부분이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6).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설교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공손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데 설교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했다(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그리스도 중심적 예배], 70).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성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지능이 높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있어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
합동신학대학원의 이승진 교수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볼 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2차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명제가 실제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 과정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했다(이승진, [설교를 위한 성경해석], 1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가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읽거나 노래하는 말씀이 아니라 입으로 설교된 말씀의 방편으로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롬 10:7).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설교하는 일에 그분의 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회중들이 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설교로 말미암음이요 이는 역사를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언약의 표와 인과 관계된 설교를 통해 회중들은 거룩한 믿음 안에서 더 강해지고 세워지며,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집니다. 설교를 통해서 회중들은 순결함 안에서 보호받고 전투 가운데 격려를 얻으며 고난 가운데 치유 받고 신앙고백 안에서 굳게 세워집니다. 양떼는 설교를 통해 교회에 머무르게 되고 교회는 그 양떼와 함께 권위와 존경과 예배가 더욱 흥왕하게 됩니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7)
설교의 중요함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할 수 없다. 설교자라는 직무의 가치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감추심으로부터 나누어주시는 영생의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직책, 직분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책임과 부르심은 전달하는 자에게 막중하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7).
설교는 예배에 있어 하나님께서 회중에게 말씀하시는 은혜의 시간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영생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이에 참여해야 한다. 그 책무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혹 설교의 열매와 소산에 대한 감식전문가로 스스로를 여기는 자는 누구든지 불평할 이유를 찾아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웅변가나 강사의 표준으로 설교자와 설교를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회중이 있고 무수히 많은 설교자들이 존재한다. 그들 모두가 반드시 웅변가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뜻에 결함이 있다는 것과 같다.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소수의 설교자들에게 웅변술의 은사를 주시기 때문이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8).
많은 설교자들이 이 점을 우려하고 있다. 모세처럼 입이 뻣뻣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는데 어찌 설교를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설교자가 가진 학문, 지식, 언어, 습관, 방식을 다 동원해 설교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도우심이 없으면 이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 우리는 설교자로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바빙크는 또한 “우리는 말씀의 사역자가 주일에 두 번 설교해야 하고 여전히 주중의 다른 경우에도 설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그의 다른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그는 항상 신선하고 새롭고 최신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8).
설교자에게는 매우 많은 설교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래서 그 설교를 준비하다가 지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설교 준비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그만큼 귀중하고 중대하기 때문이다.
번 포이트레스 박사는 “성경 자체가 성경이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관여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이끌고 관장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 기록된 결과는 인간의 산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의사소통이다”라고 했다(번 S. 포이트레스,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학], 58).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분이고, 우리를 설교자로 세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능력, 지식을 의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에 임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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