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토 슈사큐의 “침묵“
얼마 전 엔토 슈사큐의 실화 소설 “침묵”이 영화로 상영되었습니다.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 침묵(Silence)은 지난 2016년 11월 로마에서 시사회를 가졌고, 12월에 미국에서 상영되었고 한국에는 2017년 2월에 상영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했다는 것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순교적 상황에서 다루었다는 점과 유명한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다는 이유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침묵’이라는 소설은 이미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읽혀지고 알려진 작품이었습니다. 침묵이라는 원작 소설이 갖는 충격적인 줄거리 까닭에 영화가 일반에 공개되기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인 시사회가 있었고, 이어서 바티칸 추기경들에 의한 특별 시사회를 거쳤습니다. 그만큼 작품이 다루는 문제가 심상치 않았던 것입니다.
침묵의 줄거리를 거칠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회 소속 저명한 신학자인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선교지 일본에서 탄압에 굴복하여 배교했다는 소식이 로마 교황청에 전해집니다.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는 일본에서 33년을 체류하며 복음을 전하던 베테랑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일반 신부가 아니라 주교(主敎)였습니다. 신학적 실력이 뛰어났으며, 박해를 받으면서도 잠복해서 선교를 계속해 온 불굴의 신념을 지닌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주교가 배교를 맹세했다니 교황청이 발칵 뒤집힌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 소식을 들은 젊은 세 신부가 분개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주교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은사였던 페레이라 신부가 이교도에게 굴종해 배교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진실을 밝히고, 선교지 일본을 새롭게 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세 젊은 신부는 일본에 건너가기로 결심하고 지원합니다. 세 사람의 열정과 결심을 받아들인 천주교 당국은 1637년 그들에게 일본 선교를 파송합니다.
젊은 세 신부 중 한 사람은 건강 악화로 일본에 들어가지 못하고 프랜시스 가르페와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두 신부만 일본 땅을 밟습니다. 그들은 마카오에서 만난 일본인 키치지로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잠입합니다. 일본은 더 이상 천주교에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천주교를 통해 이미 유럽의 문물과 조총을 입수한 일본은 더 이상 천주교가 필요 없었던 상황입니다.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자신과 일본의 신자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무서운 “침묵”을 경험합니다. 도망치던 로드리고 신부는 안내자 키치지로가 배신하여 밀고하여 체포됩니다. 이 과정에서 로드리고는 수많은 신자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몸이 묶인 채로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는 신자들을 보고 무심코 그들에게 달려가서 함께 익사하는 자신의 동료 카르페 신부의 모습도 봅니다. 그들 죽음에서 영웅적인 모습도 없고 그 처참한 순교 후에도 아무 변화가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하나님의 “침묵”에 갈등합니다.
당대의 일본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성화를 밟으며 예수를 부인하는 것을 강요받습니다. 예수님 성화를 밟지 않으려고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눈앞에서 죽어가는 신도들을 지켜보며, “네가 배교를 하지 않으면 일본인 교인들이 하나둘 고문당해 죽어갈 것”이라는 협박과 회유 앞에서 고뇌합니다.
복음전파를 위해 일본에 왔지만, 그 복음으로 인해 죽어가는 교인들을 보며 로드리고 신부는 한없이 괴로워하고 아파합니다. 이토록 극한 상황 속에서 절규하는 신자와 자신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침묵에 당황하고 갈등합니다. 그는 성화를 밟아 성도들을 살리는 것이 믿음의 용기인지, 성도들의 죽음을 보고서도 끝내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순교를 선택하는 것이 믿음의 용기인지 갈등합니다. 하나님 침묵에 대한 아픔도 깊어 갑니다.
우리도 이 신부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의 침묵은 있습니다. 믿음의 영웅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믿음으로 이긴 사람들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침묵을 이깁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피하다가 감옥을 가는 장면에 하나님은 침묵합니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요셉의 피맺힌 기도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억울했겠지만 요셉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침묵으로 채워지는 그 고난의 세월을 믿음으로 인내합니다.
욥의 고난의 현장에도 하나님의 침묵이 있다. 욥의 고난에 하나님의 설명이 없다. 하나님의 설명이 없는 무서운 고난의 현장에서 욥은 하나님을 향한 무한신뢰를 보낸다. 욥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다. 고난을 이기는 신앙의 모범을 보인다.
얼마 전 목회자 모임에 참석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목회의 아픔이 나눠졌습니다. 어렵게 양육한 성도를 좀 더 여건이 좋은 이웃 교회에 빼앗긴 목회자의 아픔을 들었습니다. 초신자를 양육하고 세워서 이제 쓸 만한 일군이 되었는데 이웃교회에 빼앗기는 아픔을 나누는 대목에서 모든 목사님과 사모님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데 마음도 너무너무 아팠습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야속한(?) 하나님의 침묵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편(13편)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에 절규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침묵에 절규하셨습니다. 모든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선교와 목회의 현장에서, 사역과 섬김의 자리에서, 질펀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있습니다.
‘침묵’의 한 대목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맺습니다. 로드리고 신부가 ‘주여 당신은 이 참혹한 죽음을 보시며 여전히 침묵하고 계십니까?’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있었다.’ 주님이 나와 함께 아파하며 고난당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침묵 속에서 우레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진정한 믿음일 것입니다. 구름 낀 깜깜한 밤하늘에도 빛나는 별들이 있듯이 무거운 하나님의 침묵에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외침이 있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