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역 선교부 개척

미국에 머물며 드류 선교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온 최은수 교수(버클리GTU 객원교수·남장로교연구소 대표)는 “후손들이 선교사 부부의 평생 염원을 존중하는 뜻에서 선조들의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미국 버지니아대 의대를 졸업한 드류 선교사는 1894년 1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3월 12일 서울에 도착했다. 미국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 중 최초의 의사로, 조선에 도착한 지 보름만에 햄던-시드니칼리지 후배이자 8살 아래였던 레이놀즈 선교사와 함께 호남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당시 답사는 서울과 인천, 군사, 정읍, 영광, 목포, 해남, 진도, 고흥, 벌교까지 호남 서해안 대부분 지역을 방문하는 여행이었으며, 4월경에는 전주지역에서 서양 의술을 처음으로 시행하기도 했다.
호남지역 답사는 선교 스테이션을 설치하기 위한 취지였으며, 드류 박사는 나중에 남장로교 선교 스테이션을 세워졌던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은 그가 추천한 바 있는 고장이었다.
드류 선교사는 1895년 서울에 콜라라가 대유행하면서 사망자가 속출할 당시에는 전킨 선교사가 이끌던 서소문 채플에 합류해 환자를 돌보고 보건위생 강화에 역할을 했다.
1896년 4월 군산으로 내려가 전킨 선교사를 도우며 선교 스테이션을 개척한 드류 선교사는, 그해 6월부터 2년 동안 약 4천명의 환자를 치료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사역했다. 또 선교배을 타고 도서 지역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환자를 돌봤다. 섬 선교의 효시이자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사역을 펼친 셈이다.
하지만 순회전도와 의료활동에 매진하면서 건강이 크게 악화됐고, 드류 선교사는 1901년 가족과 함께 안식년 차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이후 선교지로 복귀할 수 없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항 검역소에서 검역의사로 근무하면서도 조선을 향한 애정을 간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해외 독립운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점이 눈에 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한인들이 고통받을 때는 고종 황제가 보낸 미화 1900불을 집행한 인물이 드류 선교사였다. 또 미국에 도착해 떠돌던 도산 안창호 선생을 자신에 집에서 한동안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도산에 대한 후원은 그가 훗날 해외 독립운동의 초석을 놓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최은수 교수는 “최근 후손들의 증언을 듣고 당시 정황을 분석해 보면, 일제는 노골적으로 미주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지원하는 드류 박사를 요주의 인물로 판단하고, 그가 선교지로 귀환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드류 선교사는 조선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소망을 갖고 태평양 연안 오클랜드에서 평생 월세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사망 후에는 바클리대학에 시신을 기증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했고, 그의 시신은 해부학용으로 사용된 후 화장되어 오클랜드 차임스채플에 아내 루시 드류 선교사와 함께 안장됐다.
최 교수는 “전라도 선교지로 가고자 하는 드류 선교사 부부의 뜻을 생각해 시신의 일부는 태평양 바다에 뿌려졌다. 전라도 해안에 닿고자 했던 두 분의 평생 염원을 존중한 후손들이 이번 송환을 결정했다. 앞으로 전라도 유관 기독교 단체들과 협의를 거쳐 모실 예정”이라며 기도를 요청했다.
[아이굿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