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19, 2024

[황현조 박사 칼럼] “산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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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조 목사(커네티컷교협회장, 비전한인교회 담임)

“산다는 것의 의미”

근대 한국 역사를 돌아보면 일련의 비극적인 일들이 줄을 이었다. 국제정세에 무지한 대원군의 쇄국정책, 일제의 무자비한 한반도 강점과 약탈, 인류 역사상 6번째의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되는 6‧25 전쟁… 1960년대 초반 한국은 1인당 GDP 100달러 수준으로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당시 모두의 귀에 익었던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 노래와 함께 온 국민이 땀과 힘을 모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다. 이제 한국은 선진국 클럽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이자 경제규모 세계 10위권에 들 정도가 되었다.

반면에 한국은 자살률 세계 1위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동시에 안고 있다. 한국 국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평균의 2배이고 행복지수(삶의 만족도)는 OECD 34개국 중에 26위로 최하위권이다. 경제력은 행복의 요소중 하나이긴 해도, 경제력과 행복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생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상실할 때 인간은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유대인 집단수용소에서 살아난 빅토르 프랭클은 인간이 사는 의미에 대해 자신의 체험적 저서를 남겼다. 혹독한 고통뿐인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을 버티게 한 것은 의미와 희망이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것은 프로이드가 주장한 성욕도 아니었고, 알프레드 아들러가 주장한 권력욕도 아니었다. 그것은 산다는 것의 의미와 희망이었다.

프랭클은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다. 89%의 사람들은 산다는 것의 의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61%의 사람들은 의미 있는 일이나 사람을 위해 기꺼이 죽기까지 하겠다고 대답했다. 바울 사도는 오직 주님을 위해 그러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역대 신앙적 순교자들은 하나님을 위한 궁극적인 의미 때문에 용감하게 죽었다. 까뮈는 그의 소설 “전락”(The Fall)에서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의미 없는 것이라고 순교자들을 비하했다.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는 생전에 세상에서 제일 의미 없는 죽음이라고 말했던 교통사고로 죽었다.

유대인이었던 프랭클은 인생의 궁극적 의미가 그리스도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책에서 강조한 것은 인간 속에는 분명히 영적인 면이 내재한다는 점이었다. 인간은 자신 속에 내재한 영성을 외면하면 결코 의미와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 프랭클은 우울증과 절망감에 처해있는 인간을 치료하는 길은 궁극적으로 영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밝혔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치료 방법은 정신요법(Psycho-Therapy)이 아니라 의미 요법(Logo-Therapy)이었다. 의미 요법은 인간 속에 내재한 영적인 면을 터치함을 통해 절망과 우울증을 치료한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깨닫게 하고 그 목적에 응답하여 인간이 살아야 할 참 의미를 발견토록 해주는 요법인 것이다.

우주 세계가 하나님 없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는 진화론자들이나 무신론자들마저도 때로는 산다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애를 썼다. 무신론적 허무주의 철학자 니체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외치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그는 “초인(超人)의 의지”를 내세우며 발버둥 쳤지만, 결국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10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지내다가 불행한 생을 마감하였다. 러시아 제국의 통치권을 손에 넣은 독재자 레닌도 권력 쟁취의 정당성을 자위하고 의미를 찾기 위해 하늘에 십자가 사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고 그의 부하들이 후에 증언하였다.

원래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이 살아야 할 의미를 영적인 것으로부터 찾는 것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다. 샤르뜨르, 까뮈, 야스퍼스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생 자체가 전적으로 무의미한 모순(Absurdity)이라고 보았다. 샤르뜨르는 그의 책 ‘No Exit’에서 “인간은 무의미한 모순으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있는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의미를 찾는 길은 하나님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의지로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앞서 꼭 같은 주장을 했던 니체의 비극적 종말이 샤르뜨르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스스로 입증해 주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은, 인간이 온갖 약육강식의 난관을 뚫고 아메바에서 고등동물로 진화에 성공했다면서 “인간 예찬”을 외쳐왔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 신화 속에 생성된 인본주의는 결국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로 전락하였고, 그들이 불렀던 “인간 만세”는 한갓 의미 없는 자화자찬의 아우성에 그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신론적 인본주의에서 파생된 철학적 포스트모더니즘과 신학적 자유주의는 인간의 영성을 오염시키며 인간을 무의미한 실존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 참 의미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성경은 명확히 선언하였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그들도 결국에는 그 진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땅 위의 만민들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될 그날(빌 2:10-11)이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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