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18, 2024

[황현조 박사 칼럼] 고난 주간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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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조 목사(커네티컷교협회장, 비전한인교회 담임)

고난 주간의 묵상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이다. 예수님이 왜 고난을 당하셨을까? 그는 ‘평화의 왕’ ‘화목자’ ‘Peacemaker’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는가?  화평을 추구하시는 분에게 왜 원수와 적들이 생겼을까? 또한 그들로부터 그토록 모진 고난까지 당하셨을까?  예수님께 어떤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까?  

얼핏 세상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은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평화는 이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는 본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요 14:27).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였고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에 기초한 평화였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한 평화는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여 얻어지는 일시적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의 죄악과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의 평화는 불의, 부정, 부패를 수술하고 치료한 후에 얻어지는 참 평화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입에서 이런 말씀이 나온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미국의 사상가, 교육가, 문학가였던 헨리 밴 다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성경을 읽어보면 볼 수록 이 세상에는 ‘정의를 떠난 평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에 기초한 평화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고난과 투쟁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노력에 승리를 주신다면 우리는 그 승리를 ‘정의로운 평화’를 지속시키는데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로운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세상의 죄악과 불의와 부딪쳐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창에 찔리셨다.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혀 운명하시기까지 갖은 고난을 당하셨다.  그 고통과 수치가 오죽했으면 로마의 웅변가였던 키케로가 “대로마제국 시민에게는 절대로 저 흉악한 십자가의 형벌이 내려져서는 아니되리라”고 외쳤을까?

그러나 그 흉악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고난은 곧 인류에게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한 진정한 평화를 주시기 위한 자기 희생이었다. 고로 주님의 십가가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평화는 두가지다. 첫째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평화이다. 죄 때문에 공의의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들을 위해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이제부터 더 이상 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과 진노의 대상에서 벗어나고 의롭다 칭함을 받는 평화인 것이다.

둘째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평화이다. 인간사이의 평화는 각자가 먼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어야 가능하다.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 짐이 없이 수평적으로 인간 사이의 평화가 제대로 성취될 수 없다. 수직적으로 하나님의 공의, 은혜, 사랑을 체험하여 각자의 인격이 올바르게 치료되어질 때 수평적으로 인간사이의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의 두 막대기가 교차한다. 수직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수평적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음을 십자가는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국부 간디는 힌두교도였지만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애독하고 기독교의 매력에 끌렸던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예수의 희생적 순교와 신적 교훈을 받아 들인다. 그러나 십자가 속에 어떤 신비적이고 기적적인 덕이 존재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는 아쉽게도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십자가는 불신자에게 ‘미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고전 1:18).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시기 위한 고귀한 ‘사랑의 상처’였다.  우리 모두 이번 주간 주님 고난을 묵상하며 부활의 축복을 기다리도록 하자. No Cross, No C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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