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December 11, 2024

팀 켈러 ‘죽음 앞에서 더 깊어지는 신앙’

인기 칼럼

“췌장암 진단 후 내가 쓴 ‘죽음에 관하여’ 읽을 수 없었다”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것 중 하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신앙이 자동적인 위안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자동적인 위로와 실존적인 능력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암 진단이 닥치기 전까지, 나는 평생 다른 이들을 상담하던 목사였다. 이제 내가 했던 그 조언을 내가 들어야 한다.

인생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임박한 죽음 앞에 선 사람들에게 믿음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해 설명했다. 1975년 장로교 목사가 된 이후, 나는 수없이 많은 병상 옆에서 환자를 상담했고 때로는 그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에 함께하기도 했다. 최근 나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를 기록한 소책자, ‘죽음에 관하여(On Death)’를 출간했다. 그 책을 출간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췌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2020년 2월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시아 기독교인 대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장에 염증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캔 검사 결과, 복부 림프절이 꽤 비대해져 있긴 했지만 별로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고, 세 달이 지난 후 점검하기 위해 다시 병원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즈음 내 책이 출판되었고 또 당시 뉴욕에 사는 우리 모두는 다 COVID-19 때문에 한창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내 몸속에는 죽음의 사자가 단단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나는 온라인에서 췌장암의 희박한 생존 통계를 보며 몇 분 동안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바로 옆에는 내가 쓴 ‘죽음에 관하여’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쓴 그 책을 읽을 수 없었다.

갑자기 닥친 현실을 믿을 수 없었던 나와 아내 캐시는 많은 시간을 눈물 속에서 보냈다. 우리는 둘 다 일흔을 지나고 있었지만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말짱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오십 년간 해오던 사역을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캐시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보, 난 일흔이 되면 정말로 노인처럼 느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네요.” 우리에게는 여전히 많은 계획이 있었고 또한 자녀와 손주라는 큰 기쁨이 있었다. 병이라는 건, ‘내가 정말로 엄청 늙었구나’라고 스스로 느낄 때나 찾아오는 불청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아직은 아니지. 아니, 이건 말이 안 되지. 하나님, 지금 나한테 뭘 하시는 건가요? 성경 중에서도 특히 시편은 이런 우리의 감정을 잘 표현한다. “주님, 왜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오 주님, 일어나십시오. 왜 주무십니까?” “오 주님? 나를 영원히 잊으신 겁니까?”

죽음 앞에서, 그것도 자기가 생각하기에 부당한 이유로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믿음이 흔들리거나 또는 아예 믿음을 잃어버리는 기독교인이 적지 않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이런 현상을 많이 목격했다. 몇 년 전 암에 걸린 한 여성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더 이상 신자가 아닙니다. 믿음은 내게 아무런 힘이 되지 않습니다. 내게 이런 병을 주는 사랑의 하나님(personal God)을 나는 더 이상 믿을 수 없습니다.” 정작 암이 죽인 것은 그녀가 믿던 하나님이었다.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갑자기 나는 내가 수술대에 누운 외과 의사처럼 느껴졌다. 내가 환자들에게 하던 그 조언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것 중 하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신앙이 자동적인 위안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자동적인 위로와 실존적인 능력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관한 합리적이고 또 의식적인 인정에도 불구하고 불치병 진단은 당장 내 속에서 무척이나 강력한 심리적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꺼져가는 빛을 항해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라는 딜란 토마스(Dylan Thomas)의 조언에 따르는 대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도 안 돼, 난 죽을 수 없어. 이건 다른 사람들한테나 생기는 일이지 나한테는 아니야.”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소리 내서 말했을 때, 나는 바로 이 착각이야말로 그때까지 내 마음속에서 나를 움직이던 실질적인 작동 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화 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죽음에 대한 부정이 우리 문화를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삶이 이러한 부정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그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죽음에 대한 부정이 우리 곁을 떠난 적은 없다. 16세기 개신교 신학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머물 것처럼 일을 벌이면서 살고 있다. 죽은 시체를 볼 때면 아주 잠시 덧없는 삶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하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우리 마음은 다시금 나 자신의 영속성이라는 생각으로 고정된다.” 죽음은 우리에게 추상적인 무엇일 뿐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현실 속에서 죽음은 여전히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우리의 믿음 또한 종종 추상적인 차원에 머문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굳이 믿음이 우리에게 정신적 동의 내지 수긍, 그 이상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연극이나 영화 속 전투에는 무대 소품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내 마음에서 비로소 현실이 되는 순간, 나는 나의 믿음 또한 내 마음에서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 나는 하루를 견딜 자신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부활에 대한 이론적 생각은 이제 내 생명을 붙잡는 진리가 되거나 아니면 폐기 처분할 쓰레기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나는 단지 종교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현실을 거부하는 가운데, 평생 가졌던 신념마저 사라지는 과정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적지 않게 목격했다. 나는 또한 목사로서 단지 명목상에 불과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나 또는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병들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우주에 대한 일련의 믿음을 가지고 산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은연 중의 믿음은 물질세계가 저절로 생겨 났고 또한 우리가 죽은 후에 갈 초자연적인 세계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작가 줄리안 반스(Julian Barnes)가 주장했듯이 죽음은 결코 두려워할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의 항목이며, 사람들은 반스가 가졌던 생각을 활용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차단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세속적인 믿음이 위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비종교인들조차 종종 죽음이라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유한성과 죽음이 주는 확신이 마침내 당신이라는 존재를 관통할 때, 우리를 무너뜨리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그 현실을 대면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더 큰 은혜와 사랑과 지혜로 보낼 방법은 없는 걸까? 나는 분명히 있다고 믿지만, 거기에는 지적이고 감정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즉, 머리와 마음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내가 지금 머리와 마음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각각 추론과 느낌을 의미하는 이 두 단어의 기능이 상호 독립적이라는 현대적 관점을 반영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은 마음이 생각과 의지 그리고 감정의 중심을 차지한다고 본다. 잠언은 “사람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대로다”라고 말한다. 즉, 합리적인 신념과 경험이 내 생각을 바꿀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는 결코 내 속에 일어나는 변화가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신념을 재검토함으로써 내 신앙을 강화하기로 했다. 과연 신앙이라는 게 죽음을 상대할 수 있는지 말이다.

정형외과 의사인 폴 브랜드(Paul Brand)는 의사 인생 전반부를 인도에서 그리고 나머지를 미국에서 보냈다. 최근에 낸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미국에서 …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통을 피하려는 사회를 만났습니다. 환자들은 내가 이전에 치료했던 환경과 비교할 때 훨씬 더 안락한 수준에서 살고 있었지만 고통을 처리하는 그들의 능력은 훨씬 취약하고 고통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훨씬 더 심각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 풍족한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악의 존재와 고통 그리고 죽음 때문에 더 고통받는 것처럼 보일까?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그의 책 ‘세속 시대(A Secular Age)’에서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방법과 정의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했지만, 아주 최근까지도 고통이 하나님의 존재를 말이 안 되게 한다고는 결론 내리지 못했다고 썼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부적절함이나 죄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다 편안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식의 현대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 인간은 자신의 논리적인 능력에 너무도 자신감을 갖게 된 나머지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 타당한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면 아예 고통이란 없다는 식으로 가정한다고 테일러는 주장한다.

그러나 당신이 목격하거나 인내하는 고통에 대한 당신의 분노를 처리할 정도로 위대한 신이 있다면, 당신이 결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해도 그런 고통을 허용하는 분명한 이유를 가진 위대한 신도 있기 마련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가 행하시는 선과 악의 모든 이유를 다 알 수 있다고 확신하거나 또는 그 하나님이 항상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물을 대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테일러의 요점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게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갖고 있는 지나친 확신이 그들로 하여금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혼란을 자아낼 뿐이라는 것이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역사적 개신교의 정통과 일치하는 공개된 나의 믿음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내가 실제로 갖고 있던 지식까지도 함께 살펴보아야만 했다. 내 믿음이 사실은 내가 사는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행여 무의식적으로나마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가정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삶은 다 내 중심으로 잘 돌아가야 하고, 이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다”였다. 내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받아들이면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처음에는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내 직관에 반하는 것이지만, 심오한 차원에서는 해방감을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만큼 작고 유한하다고 가정하는 것이 맘이 편할지는 몰라도, 그것은 결코 분노에 대한 치료법이 될 수 없다.

머리가 필요한 또 하나의 영역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미 부활절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한 상태였다. 암 진단을 받기 이전까지만 해도 부활은 내게 사실상 상당 부분 이론적인 문제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내세에 대한 믿음이라는 게 사실상 아무런 근거가 없는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숱한 비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은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Flying Spaghetti Monster, 기독교를 패러디한 종교의 숭배 대상물 – 역자 주)을 믿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 이십 년 동안 나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사례를 제시한 영국의 성경학자 톰 라이트(N. T. Wright)의 작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제 나는 과거와 비교할 때 훨씬 큰 회의론적 생각을 가지고 톰 라이트가 연구한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다. 나는 쉽게 설득되고 싶진 않았지만, 그의 글을 다시 읽어 가면서 그가 내세우는 주장이 오히려 과거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공정하게 보였다. 그의 책은 내가 발을 디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부활을 믿는 데 단지 정신적 동의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했다.

추상적인 믿음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념 사이의 틈을 메우려 애를 쓰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마음의 역할이다. 초기의 미국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주장했듯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증거하는 꿀의 달콤함을 믿는 것과 실제로 꿀을 먹고 그 달콤함을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꿀의 단맛을 혀로 느끼는 것은 꿀이 달다는 그 어떤 합리적인 추론보다 꿀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져다준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능력 그리고 지혜와 같은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믿는 것과 마음속에서 그런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르다. 성경은 감각적인 언어로 가득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할 뿐 아니라 그의 선하심을 ‘맛보아야’ 한다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영광스럽고 능력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에베소서는 말한다.

1273년 12월 6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그의 기념비적인 책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의 저술을 중단했다. 친구 레지날드가 왜 그런지 물었을 때, 아퀴나스는 그가 쓰고 있던 모든 신학을 “짚처럼 초라하게 보이게” 만드는 하나님에 관한 경이로운 체험을 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신학 자체를 부인하려고 아퀴나스가 이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하나님에 관한 지도를 그리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경험하는 것의 심오한 차이를 경험했던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하나님에 대한 나의 체험이 “황홀했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과거와 비교할 때 분명히 더 깊고 더 달콤했다.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내게는 세 가지의 훈련이 필요했다.

첫 번째로 내가 만든 하나님을 더 이상 만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시편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은 당연히 더 인자하고 덜 공격적이지만, 내 마음이 너는 희망이 없다거나 또는 내가 무가치한 존재라고 말할 때 내가 만든 그런 착한 하나님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시편이 드러내는 하나님은 너무도 복잡하지만, 그렇기에 어려운 그 하나님은 감히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시편을 통해 나는 점점 더 “우리와 관계를 맺는 바로 그 하나님” 앞에 내가 서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 훈련은 에드워즈와 같은 초기 작가들이 영으로 ‘혼자 소리 내어 말하기(soliloquy)’라고 부르던 것이다. 시편 42편과 103편에서 우리는 그런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편 저자가 말하는 대상은 하나님도 또 독자도 아닌 자신의 영혼, 자기 자신이다. 그들은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마음을 향해 말했다. 그들은 마음을 샅샅이 살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을 새롭게 했다. 그들은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로 인해 불이 붙을 때까지 마음을 향해 진리를 선포했다.

나는 내가 가장 굳건하게 믿고 있는 믿음을, 또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사랑과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것들을 다 하나님 앞으로 가져와야만 했다. 그러면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은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가 쓴 것처럼 “일종의 조율 … 부드러움, 평화, 기쁨, 사랑, 행복, 고귀한 만나(manna) … 평범함 속의 천국”으로 나를 이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아무리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또 영적 독백을 하고 기도를 해도 이런 음악이 내 속에서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이라는 현실과 그분의 약속은 내 속에서 점점 더 커져갔다. 나의 상상력은 점점 더 선명하게 부활을 시각화했고, 내 마음은 그 속에서 안식을 찾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게 특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단지 내가 믿고 한편에 제쳐두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나를 지탱하는 희망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매일 다음과 같이 기도를 했다. 때로는 기도할 때 짜릿한 전기가 통하기도 하지만 그 마지막은 언제나 평안이다.

“오늘 밤 잠이 들고 내일 아침 당신의 은혜로 인해 눈을 뜰 때 내게 기쁨을 주는 생생한 사실에 사로잡히게 하소서. 그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또한 나의 의를 위해 다시 부활하셨기에 내게도 최종적인 부활이 임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적 사실이 내 안에서 커짐에 따라 내가 사는 방식에는 어떤 영향이 있을까? 설명하기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바로 내가 느끼는 기쁨과 두려움에 관해서다. 암 진단을 받은 이후로 캐시와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만들려고 노력할수록,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편안함과 안정을 더 뿌리내리려고 노력할수록, 우리는 그 천국을 오히려 더 누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캐시는 우리가 휴가를 보내는 친숙하고 편안한 장소에서 깊은 위안과 휴식을 찾는다. 그중 어떤 곳은 전선에 전등만 달린 오두막이지만, 그곳은 캐시에게 일종의 향수를 부르는 곳(Sehnsucht)이고 그녀가 갈망하는 장소다. 내게 있어서 가짜 구원은 직업적인 목표와 성취, 즉 새로운 책, 또 다른 사역 프로젝트, 교회가 이루는 또 하나의 업적이다. 그러다 보니 해변에서의 휴가가 끝나갈 때가 되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서로 정반대이면서도 또 이상하게도 똑같았다.

휴양지에 도착하자마자 캐시는 곧 떠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불평을 하곤 했고,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그녀는 휴가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그녀는 오두막 현관의 난간에 자신을 수갑으로 채워서라도 그곳에서 떠나지 않는, 그런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서 사역에 복귀하고 싶어 조바심을 내곤 했다. 자연스럽게 해변에 앉아서도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역에 관한 브레인스토밍 내지 계획표 작성으로 보냈다. 그렇게 온전히 휴가를 즐기는 법을 모르던 우리 두 사람은 휴가가 끝나도 재충전이 되어서 집에 돌아온 적이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완벽하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은 바로 초록색의 키 작은 제다이 마스터가 했던 말이다. “그는 평생 동안 먼 미래인 지평선만을 바라보았다. 단 한순간도 그는 현재 있는 그 자리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다.” 캐시와 나는 좀 더 현명했어야 했다. 아니, 사실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뭔가 좋은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기대할 때, 그래서 그 속에서 가장 큰 위로와 사랑을 찾을 때, 그것이 뭐가 되었든지 결국은 우리를 실망시킬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 우리의 마음은 결코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18세기 찬송가 작가 존 뉴튼(John Newton)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묘사했다. “자존심과 자아라는 내적 시련을 통해서 내가 너를 해방시키고 이 땅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너의 모든 시도를 다 깨뜨리는 이유는 바로 네가 오로지 나를 통해서만 네 자신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와 캐시는 놀랍게도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을수록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이 세상에게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아주 단순한 것들에서 기쁨을 찾는다. 물 위에 뜬 태양과 꽃병 속의 꽃에서부터 서로를 포옹하고 섹스를 나누며 대화를 하는 것 등등.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이전보다 더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 이런 사실에 우리는 많이 놀랐다.

이런 변화가 단 하룻밤에 일어난 혁명은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실재가 내 마음을 더 많이 채울수록, 비록 느리고 고통스럽고 또 많은 눈물이 따라왔지만, 이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단순한 기쁨이 내 하루하루를 채우는 행복의 원천이 되어갔다. 더 나은 용어가 없기에 나는 이런 내가 천국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지만, 나는 이 물질세계 속에도 실로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넘친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고 있다.

지나친 감상에 빠져서 또는 과장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내 인생에서 지금처럼 행복했던 적은 없었고, 지금처럼 하루하루가 위로로 가득했던 날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요즘처럼 슬픔에 가득한 날을 보낸 적도 없었다. 우리 부부의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 육 년 전에 남편을 암으로 잃었다. 평소에는 괜찮아 보이는 그녀지만 지금도 갑자기 떠오르는 어떤 기억이나 생각 하나에 그녀는 쓰러질 것처럼 휘청대고 또한 슬픔에 허우적거린다.

맞다. 그건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휘청거림에도 감사한다. 그런 슬픔과 아픔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번 방향을 조정해서 머리가 주는 확신과 마음속 과정을 재정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어떻게 대처했고 또한 어떻게 기쁨을 누렸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어 묵상할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위안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달콤하다.

원제: Growing My Faith in the Face of Death

출처: www.theatlant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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