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상을 바라보라!(빌 3:10~14)”
오늘은 2024년도 1월 7일 신년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사 새로운 한 해를 또 허락해 주셨으니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그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들에게는 복이 되는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벌써 새해를 맞은 지도 일주일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뒤돌아보며 후회하지 아니하고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과 같이 하늘 상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을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거의 모든 것을 다 가진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든 특권을 배설물과 같이 버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할 때에는 감옥에 갇힌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의 의지와 목표는 너무나도 분명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빌3:13-14)”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순교의 제물이 되었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당당하게 하늘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떠난 지 2천 년도 더 지난 오늘 우리는 그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들의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2024년도 우리교회의 표어는 “하늘 상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들이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땅엣 것 보다 하늘의 상을 더 사모하며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있기에 사도 바울과 같이 당당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주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서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서 해방 되어 신선한 새해를 살아갈 지혜와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상은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이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상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개근상과 우등상을 비롯하여 각 종 표창장을 받게 되나 사회에 나왔을 때도 숱하게 많은 상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벨상도 있고 스포츠에서는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연금이 달려 있는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도 있습니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와 같은 상을 받는 모습은 비록 우리가 그 상의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흐뭇하고 저절로 박수갈채가 나오는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최고의 상인 하나님의 상은 세상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받은 각종 메달과 트로피는 주인공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는지 거추장스러워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하늘 상은 이 땅에서도, 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최고의 바람은 이와 같은 하늘 상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 상을 바라보며 기꺼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도 하늘 상에 올인하였을까요? 이것이 그의 명예욕이었을까요? 아니면 상에 대한 그의 특별한 집착이었을까요? 그 해답은 이 둘 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도 사모하고 삶의 목표로 삼았던 하늘 상은 바로 믿음의 본질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우리 하나님을 믿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핵심적인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 하나는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견지해야 할 믿음의 본질입니다. 여기에 반하여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부인하거나 그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의심하게 될 때 우리들의 믿음은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존재 그 자체인 믿음이 이렇게 흐트러질 때 평생을 신앙생활을 하고 예배를 드린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늘 상을 기대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그래서 우리들의 모든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피시니 그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들의 선악을 다 파악하셔서 상과 벌로 심판하십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믿고 똑 바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분이 오늘 우리들의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상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이 말씀과 같이 오로지 하늘 상만 바라보고 쫓아갔던 사도였습니다. 상을 바라보는 모든 선수들이 그러한 것처럼 사도 바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앞에 있는 상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임을 당하는 것조차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끝까지 그 상을 바라보고 달려갔던 것입니다. 다음의 그의 고백이 그의 이와 같은 삶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8)”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는 이렇듯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서 준비하신 상을 논하기 전에 그 상을 받을 만한 삶을 살아왔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삶의 목표만 하늘 상으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을 받을 만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도전을 받고 또 새로운 결단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비단 하늘 상을 바라보는 오늘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도 상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경쟁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눈물이 날 정도로 치열합니다. 전 세계에서 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금, 은, 동메달을 받을 세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목숨을 걸다시피 상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딘 김제덕이라는 양궁 국가 대표선수는 다섯 살 때 부모님이 갈라서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라는 비운을 겪었지만 오직 앞만 바라보고 양궁 하나에 전부를 걸었던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대한민국 국가 대표선수가 되었고 이제 겨우 스무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계를 재패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보통 최고로 해도 하루에 500번 밖에 못한다는 활쏘기 연습을 700번까지 화살을 당기며 연습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피눈물 나는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당하게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어쩌다가 마음에 감동이 올 때 한 두 번씩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이와 같은 하늘 상을 바라보고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 다음 성경 말씀에서 도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3-38)”
여기에서 우리는 38절 괄호 속의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누가 이렇게 믿음을 지키고 하늘 상을 바라본 성도들의 삶을 상상이나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보통 사람이나 성도들과 달리 하늘 상을 받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상은 그만큼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어차피 하나님을 믿고 나중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그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성도라면 최선을 다해 이와 같은 상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지 간에 다 놓고 가야 할 일시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결국은 일시적으로 누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먼 훗날에 영원히 누릴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였던 모세도 일찌감치 이와 같은 진리를 가슴에 품고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엄청난 부귀영화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외길을 선택하며 하늘 상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모세도 이렇듯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고난을 더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들도 희망찬 2024년도 새해를 맞아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는지 도전을 받고 삶의 진정한 목표를 새롭게 설정하여야 하겠습니다. 상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결단과 노력으로 받는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상을 받으려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고전9:25)”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상은 사모한다고 받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노력과 땀으로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더 조건이 추가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상하셔서 여기에 관해서도 소상하게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절제와 법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세상에서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도 이기기를 힘쓰고 절제한다고 꼬집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하늘 상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더 절제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바로 “절제”인 것입니다. 이 한 단어 속에 만 가지의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 살면서 하늘의 상을 바라본다면 절제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예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그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버렸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7-9)”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하늘 상을 바라보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앞에서 절제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다 하나로 묶어서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절제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자아를 위한 자존심과 자신의 유익을 위한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늘 상을 받기 위해서는 절제에 이어 법대로 쫓아야 한다는 조건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선수는 기본적으로 Rule(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금메달 권에 들었다 해도 실격처리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에서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기에는 이것을 지키고 관리하는 심판이 있고 또 심판에게 항의하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어 비치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경기장이 질서도 없고 오로지 우승하겠다는 선수들로 난장판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법이 있으므로 경기장에 질서가 있게 되고 우승한 선수들을 비난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이렇거늘 하물면 만왕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경기장에 법이 없겠습니까? 심판이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하늘 상을 기대한다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과 규칙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법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똑 같이 주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자신이 지금 어떻게 살고 어떻게 이웃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말씀이란 법에 비추어보며 상을 향한 바른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씀을 떠나거나 말씀을 제쳐놓을 경우 그곳에는 하나님은 없고 인간만 있는 다툼의 현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행6:1-4)”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늘 상을 쫓아가는 우리들의 천국 여정에 말씀이란 법을 떠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겠습니다. 법을 위반한 경주자에게는 결코 상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상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길에는 반드시 절제와 법이 필요함을 깨달아서 그 누구도 제 마음대로, 제 욕심대로 경기장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질서가 있고 심판에게 복종하는 선함이 있는 제대로 된 경기자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사도 바울과 같이 하늘 상을 받아 누릴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승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새롭게 주어진 축복의 2024년도도 이와 같은 기초적인 믿음과 열정으로 사도 바울과 같이 하늘 상을 기대하며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멋들어진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