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y 20, 2024

[역사기획/ 낙도로 간 선교사들] (3)신안의 섬 선교 아버지 맥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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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희 목사(낙도선교회 대표)

복음의 항해로 수많은 섬들에 풍요로운 영적 생태계 이루다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스테이션을 만들고, 그 선교스테이션을 중심으로 일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선교스테이션은 요즘 말로 하면 선교플랫폼이다. 교회, 학교, 달성경학교, 병원은 선교스테이션의 가장 기본적인 선교 생태계를 형성했다.

하지만 선교플랫폼을 움직이는 동력은 스테이션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땅 끝을 찾아가는 순회선교로 확대됐다. 그리고 그 순회선교를 통해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을 선교스테이션으로 보내어 양육을 통해 제자로 만들고, 다시 땅 끝으로 보냈다. 선교스테이션과 땅 끝 영성의 선교흐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맥컬리 선교사가 전남 신안 일대에서 항해하며 복음을 전파한 주요 지역을 보여주는 지도.

섬으로 간 목포의 캡틴 선교사

전남 신안군은 섬들로 구성된 지역이다 이 지역의 선교는 1908년 미국남장로교 목포선교스테이션에 부임한 맥컬리(H. Douglas McCallie·한국명 맹현리)에 의해 시작되었다.

목포선교스테이션은 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 1897년 세워졌다. 목포 양동교회를 필두로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가 설립되고, 목포진료소도 세워졌다. 맥컬리 선교사는 신안의 섬들을 다니며 선교하면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 중에 인재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을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로 보내 가르쳤다.

전남 신안에 풍성한 영적 생태계를 이룩한 맥컬리 선교사.

교회를 맡을만한 인물들을 만나면 달성경학교로 보내 성경을 배우게 한 후,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를 책임지도록 했다. 매년 한 달씩 열리는 달성경학교를 5년 이상 다니면 교회 조사가 되도록 했다.

맥컬리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고 달성경학교를 다닌 인물 중 대표적인 분이 박도삼 장로이다. 박 장로는 맥컬리 선교사의 동역자가 되어 도초중앙교회와 흑산도 예리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섬 순회전도자로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그의 아들 박요한 목사는 목포 영흥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중에 교단 총회장이 되었다.

순회선교는 선교플랫폼을 확장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영적 파워였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학교가 정체된 이유는 선교플랫폼 안에 들어가야 할 순회선교의 땅 끝 영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와 그 역동성을 체험하는 순회선교의 영성이 결여되면, 플랫폼은 지위와 조직과 규칙으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영성이 아닌 인간의 힘은 역사의 현재와 미래를 바꿀 수도 없고, 지탱할 수도 없다.

선교스테이션에서는 의료선교사로 사역하더라도 말을 타고 오지로, 배를 타고 섬으로 선교하기 위해 나아갔다. 선교사들의 전문영역의 끝은 순회선교였고, 영혼 구원이었다. 복음으로 표현되지 않는 전문선교란 있을 수가 없었다. 땅 끝은 중심과 함께 움직인다.

신안의 첫 교회 비금도에 서다

1907년 한국에 온 맥컬리 선교사는 1930년 귀국할 때까지 23년 동안 머물며 열정적으로 사역했다. 신안이 복음의 낙원이 될 수 있도록 한 그를 ‘섬 선교의 아버지’라고도 부른다. 그는 또한 신안은 물론 진도 완도 해남 강진 장흥 등지까지 순회하면서 수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1933년 미국 신문에 게재된 맥컬리 일가의 모습. 뒷줄 맨 왼쪽이 맥컬리 선교사이며, 앞줄은 그의 부모들.

선교를 위해 손수 복음선을 제작한 한국 최초의 선교사이기도 했다. 고군산군도의 전킨이 황포돛배를 구입해 복음선으로 활용했다면, 맥컬리는 신안 진도 완도 등 전남 서남부 섬들을 돌아다니기 위해 아예 자가용 복음선을 만들었다. 캡틴(captain·선장) 선교사인 맥컬리와 함께 복음을 전했던 권서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배는 주방장 권서인 개인비서 등까지 4~5명이 탑승할 수 있는 동력선이었다.

필자는 맥컬리 선교사가 타고 다닌 복음선의 사진이 혹시 남아있지는 않을까 하여 여러 곳에 수소문해보았으나 아직까지 구하지 못했다. 언젠가 그의 복음선을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이 복음선은 맥컬리가 결혼 후 바로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자기 아버지에게 신혼선물로 사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가문에서는 이 복음선을 맥컬리에게 후원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배후에는 그 선교사역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바친 수많은 선한 부자들과 헌신적인 가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아는 호레이스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선교사의 형 존 토머스 언더우드는 타자를 하면서 자신이 기록한 내용물을 바로 볼 수 있는 타자기를 발명하여 거부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번 돈으로 동생의 선교비를 지원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연세대와 세브란스병원이 처음 건립될 수 있도록 막대한 재정적 후원을 한 바 있다.

맥컬리 선교사가 동역한 여성 선교사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맥컬리의 자가용 복음선에는 아내 에밀리도 동행했다. 섬 선교는 이 젊은 부부의 신혼여행이라 해도 좋았다. 특히 간호사 출신인 에밀리의 지식과 재능은 의료 사각지대인 섬에서 훌륭한 선교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들의 섬 선교 첫 열매는 신안 비금도의 덕산교회였다. 당시는 아직 아버지로부터 복음선 후원금을 받지 못했을 때라, 풍력선을 타고 섬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포에서 출발해 약 10시간 이상의 항해를 거쳐야 비금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맥컬리는 비금도 월포리에 도착해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이 때 강낙언이라는 사람이 첫 신자가 되었다. 이후 전도를 통해 사람들이 모여들자, 맥컬리는 자신의 조사 마서규를 비금도로 파송해 예배를 인도하도록 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무안군(분군에 의해 현 신안군) 덕산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본리인 강낙언이 믿고 전도하여 신자가 초진(稍進)하여 예배당을 신건하고 선교사 맹현리와 조사 마서규, 이행언, 김경운, 김봉현 등이 차제(次第)에 시무하니라.”

이후 덕산교회는 신안군의 어머니 교회가 되었다. 비금 서부교회, 제일교회, 도고교회, 당산교회, 서산교회, 영광교회, 동부교회, 송치교회, 신안교회, 신안제일교회, 비금중앙교회, 갈보리교회, 가산교회, 비금실로암기도원 등이 덕산교회로부터 파생된 믿음의 공동체들이다. 특히 맥컬리 선교사를 만난 박도삼의 회심과 헌신으로 한국의 섬 선교 역사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맥컬리 선교사는 이밖에도 해남의 이진 의야리교회, 신안의 대척 장고 예리 자라교회, 장흥의 지천교회, 해남의 선두리 우수영 논송리 맹진 고당리 남창리 예략 원진 연당 진목리 삼금리교회, 여수의 우학리교회, 진도 진도읍 분토리교회 등을 세웠다. 전남 서해안부터 남해안까지 곳곳을 누빈 그는 진정한 복음선의 캡틴이었다.

신안의 첫 교회인 비금도 덕산교회의 옛 모습.

어머니교회 그리고 신앙 생태계

맥컬리 선교사가 덕산교회를 중심으로 이룬 영적 생태계를 바탕으로 신안의 섬들에서는 한국교회를 움직인 수많은 인재들이 나타난다. 특별히 문준경 전도사의 회심은 신안을 천국의 섬으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문준경 전도사도 맥컬리 선교사처럼 돛단배를 타고 여러 섬을 돌며 복음을 전하였다. 증도는 주민 90% 이상이 예수를 믿는 섬이 되었다.

비금도 덕산교회.

또한 문준경이라는 신앙의 어머니를 통해 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봉성 목사 등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 30여 명이 태어났다. 그 결과 신안군은 무려 33%가 넘는, 우리나라 최고의 복음화율을 보유한 지역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머니교회 개념이 사라졌다. 한국교회는 신앙의 젖줄이 된 어머니교회, 그리고 그 어머니교회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지역교회들, 그리고 그 교회의 영적 생태계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으로 영적인 흐름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자생적 흐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교회 분립 인위적인 방식 보다는, 땅 끝을 품고 선교하며 이루어지는 성령님 중심의 자생적인 방식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초기 선교사들의 행전에는 신앙의 어머니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부디 광주의 서서평, 제주의 강형신, 신안의 문준경 같은 아름다운 신앙의 어머니들이 한국교회에 다시 나타나기를 바란다.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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