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회개, 거듭남 없어
그리스도 은혜만 좇는 허상
오늘날 기독교에 가장 위협적인 것 중 하나는 무신론도, 이슬람도, 세속주의도, 심지어 박해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 곁에 훨씬 더 가까이 있는,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 바로 기독교 문화를 들 수 있다.
기독교 문화가 겉으로는 괜찮아 보일 때가 있다. 성경에 고개를 끄덕이고, 예수님을 찬양하며, 기독교 도덕이 “세상에 유익”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친다는 데 있다. 십자가도, 회개도, 거듭남도 없다.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만 바라는 믿음에 그친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공허한 허상에 불과하다.
기독교 문화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모태 신앙인이기에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결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을 살지 않는 어른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The Chosen≫과 같은 영화를 정주행하며 받은 감동을 “영적 회심”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더 초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제자들의 이야기를 성경적 배경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TV 시리즈 및 영화.]
더욱 치명적인 것은 소위 “기독교 무신론자”에 있다. 그들은 선행만으로도 충분하다며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하는 자칭 기독교인들이다. 이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를 다르게 적용하는 측면이 있는 기독교 문화의 병폐가 여기에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대신, 신앙을 세속적인 목표, 즉 명예, 전통, 가문의 유산, 혹은 모호한 도덕적 우월감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 문화가 피상적이라는 것만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치명적이라는 것도 위험하다. 진짜 기독교인으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 7:21)라고 경고했다.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진리를 알면서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용광로같은 고난을 만날 때 극복하지 못한다. 예수님을 훌륭한 스승으로만 여기는 사람들은 그분을 따르는 희생이 요구될 때 버틸 수 없다. 오직 그분을 구주이자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견딜 수 있다.
기독교 문화의 또다른 병폐는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먹고 자란다는 것이다. 기독교 문화가 존경하는 아름다움, 즉 인간 생명의 존엄성, 율법의 안정성, 사랑의 연민은 복음을 실제로 믿었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참된 믿음을 앗아가면 열매는 썩는다. 가지는 뿌리에서 잘리면 시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도덕적 질서는 허공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기도하고 순종하며, 종종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에게서 비롯됐다. 나무 없는 열매만을 요구하는 기독교 문화의 허상은 극히 위험하다.
기독교 문화의 축복은 결코 자생적이지 않다. 수 세기 동안 수백만 명의 믿음의 선진들이 진심으로 믿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없다면 진정한 기독교 문화도 그들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문화적 감동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양의 피로 지탱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부활의 비밀이다.
이영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