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잔인한 달”
철학자요 시인이었던 엘리엇(T.S. Eliot)은 그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그가 백 년 전에 이 말을 썼지만 지금도 세계적 명언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정말 4월에는 잔인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최근 역사들을 돌아보면 한국에서는 4·19 혁명, 천안함 폭침, 세월호 침몰 참사들이 4월에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4.29 L.A. 폭동, 오클라호마 연방정부청사 폭탄테러, 수많은 학생들이 살상당한 콜럼바인고교와, 버지니아텍 총기난사 사건 등이 모두 4월에 일어났다.
예수님께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십자가 형벌을 받고 죽으신 성금요일(Good Friday)이 올해는 4월이었고, 몇 해 전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148명이 무참히 살해된 케냐의 기독교대학 학살사건도 4월 성금요일에 일어났다. 이를 보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엘리엇의 말이 과히 틀린 게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원래 엘리엇이 시 제목을 ‘황무지’로 하고 ‘잔인한 4월’을 표현했던 것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황무지는 당시 1차 세계대전 후 사막과 같이 삭막해진 서구인들의 정신상태를 상징하였다. 산업혁명으로 세계가 근대화되기 시작했지만, 그 발달된 과학기술로 대량무기를 생산하여 1천여만 명이 죽고 도시가 파괴된 세계대전의 결말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인간 속에 내재한 무한한 이기심과 탐욕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었다.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줄 줄 알았던 과학적 합리주의(Rationalism)와 인본주의(Humanism)에 대한 실망과 허무감이 서구사회를 엄습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이러한 정신적 황폐함과 메마름 속에서 탈출구를 찾을 의욕이 전혀 없었다. 그저 죽어버린 겨울 땅 황무지 속에 안주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절망만 있을 뿐이었다. 그 절망이 얼마나 인류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지를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했다. 오직 세속적인 것만 추구하며 황무지에 머물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 엘리엇에게는 너무도 통탄스러웠다.
죽은 땅에서 새 생명은 결코 솟아날 수 없다. 그러나 죽은 땅에게 새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옥토로 변화될 것을 요구하는 4월의 봄이 찾아왔다. 그래서 새싹들이 솟아나게 한다면 그것은 죽은 땅에게 매우 잔인한 일이다. 황무지같이 죽은 겨울 땅에게 자신을 마구 파헤쳐서 새싹이 나오도록 변화시키니 잔인한 일이다. 또한 솟아나는 새싹들에게는 얼어붙은 무거운 땅을 뚫고 솟아 나와야만 하니 역시 잔인한 것이다.
오래전 극작가 차범석이 “껍질이 찢어지는 아픔 없이는”이라는 희곡을 써서 공연한 연극을 본 적이 있다. 아픔 없이는 허무와 절망의 껍질을 찢고 결코 나올 수 없다. 거기에는 잔인할 정도의 고통이 수반된다. 한 마리의 나비가 나오기 위해서는 애벌레를 찢는 아픔이 있어야 하고 소중한 한 생명이 출생하는데도 엄청난 해산의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죄의 굴레를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해서도 껍질을 찢음과 같은 잔인한 아픔이 따름을 교훈한다. 곧 우리에게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명하기 때문이다 (엡 4:22-24). 예수님은 이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Self-Denial)”이라고 교훈하셨다(마 16:24).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치르는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껍질이 찢어지는 아픔은 의미 있고 값진 고통이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잔인한 십자가의 아픔을 참으시고 부활 승리하신 예수님의 고통이 이를 증명한다. 세상에는 우리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일들이 많다. 불의, 불공평, 부정부패, 중상모략, 테러, 전쟁, 빈곤, 질병, 죽음… 그러나 부활 승리하신 예수님은 이 모든 고통과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봄날의 새싹처럼 기쁨과 소망이 그 삶 속에 항상 솟아나게 될 것이다. No Pain, No Gain!